미래학자 허먼 칸이 본 한국, 그리고 박정희
박정희 전 대통령(1917~1979)의 이름 앞에는 늘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혁명가, 새마을운동의 창시자,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실천자, 혹은 독재자까지.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는 **‘유능한 미래전략가’**로 조명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그가 당대 최고의 전략이론가이자 미래학자였던 허먼 칸(Herman Kahn, 1922~1983) 허드슨연구소장과 교류하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모색했다는 사실이 우연한 계기로 세상에 알려졌다.
미래학이 아직 세계적으로도 막 태동하던 1960년대 초, 이미 미래학자들과 교우하며 국가의 장기적 비전을 논의했다면 이는 실로 놀라운 선견지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미래전략’이라는 개념을 훨씬 앞서 실천한 셈이다.
박 전 대통령과 허먼 칸의 만남은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그 흔적은 박정희 시대를 증언한 일부 기록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될 뿐이었다.
조갑제 씨의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에게 허먼 칸을 소개한 인물은 고(故) 김성진 당시 문공부 장관이었다. 허먼 칸은 1960년대 초부터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 일본의 유력 정치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동양을 자주 방문했고, 그 과정에서 이웃 나라인 한국도 찾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전국경제인협회 간부였던 김입삼 씨는 허먼 칸이 전경련 초청으로 방한해 강연을 했다는 사실을 한국경제신문 기고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허먼 칸의 저서와 그의 제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의례적 만남을 넘어 한국의 미래에 대한 깊은 대화와 상호 존경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자칫 영원히 묻힐 뻔했던 두 사람의 비사(秘史)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허먼 칸의 두 제자가 한국에서 우연히 재회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허먼 칸의 수제자로 알려진 유엔미래포럼 회장 제롬 글렌(Jerome Glenn)이고, 다른 한 사람은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이자 전 숙명여대 총장인 이경숙 박사다.
2008년 말, ‘미래 전망’을 주제로 한 특강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제롬 글렌 회장은 유엔미래포럼 한국대표 박영숙 회장의 안내로 숙명여대를 찾았다. 당시 총장이던 이경숙 이사장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글렌 회장이 허먼 칸의 제자라는 소개가 나오자 뜻밖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 이사장은 1960년대 미국 유학 시절 허먼 칸 박사의 강의를 직접 들었던 경험을 떠올렸다. 당시 강의에서 허먼 칸은 세계 속에서 한국의 부상을 예측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수만 리 떨어진 작은 동양의 나라, 그것도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겨우 생존을 걱정하던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은 충격에 가까웠다.
이 이사장은 “어떻게 한국을 저렇게 정확히 알고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의아했고, 솔직히 허황되게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6·25 전쟁의 상흔 속에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조국의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미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오늘, 허먼 칸의 예측은 놀랍도록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예측의 배경에는, 조용히 미래를 논의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대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