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무작정 상경한 28세 청년 권세종씨는 삼성SDS의 웹마스터가 된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다.
공인된 ‘컴퓨터 도사’인 그는, 증권사 중에서 접속자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삼성증권 시스템의 웹서버 구축과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그와 함께 웹마스터 일을 하는 동료 선후배들은 서울대·연세대·성균관대·인하대 등을 졸업한 쟁쟁한 멤버들이다.
그는 작년 말, 삼성멀티캠퍼스 강사까지 됐다. ‘멀티캠퍼스’는 삼성SDS가 운영하는 컴퓨터 교육 사업부. 이곳 강사는 다른 기관 직원이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IT 교육을 하는 ‘선생님’이다. 회사일과 강의를 병행하도록 회사가 실력을 인정한 ‘떳떳한 투잡스’이니, 컴퓨터를 전공한 대졸 직원의 지원까지 넘쳐 경쟁률은 100대1에 가깝다.
14년 전만 해도 권씨는 초등학교 졸업장만 손에 쥔 봉제공장 ‘시다’(보조 공원)였다.
3세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여의었다. 같이 타고 있던 그가 살아난 것만도 기적일 만큼 큰 사고였다. 누나와 함께 경북 영주의 할머니 집으로 내려가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초등 3학년 때부터 새벽에 신문을 돌렸다. 5학년이 돼서는 배달신문 수를 조·석간 3개로 늘렸다. 그래도 할머니는 편찮으시고, 남매는 늘 배가 고팠다. 결국 그는 중학교 생활을 1학기 만에 접은 채 1991년 여름 ‘무작정’ 상경길에 올랐다.
서울에 오자마자 그는 가출소년으로 오인받아 경찰관에게 붙잡혔다. “배 고파서 올라왔다”고 하자, 경찰관은 근처 ‘먹고 자고 일하는’ 봉제공장을 소개해줬다.
새벽에는 신문 배달, 낮엔 공장 재단 보조일. 첫 월급 23만원을 몽땅 할머니와 누나에게 송금했다. 이후에도 월급은 늘 영주로 다 보냈고, 생활비는 신문 배달해서 때웠다. 송금한 후 받은 영수증들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보물 1호’. “뜨거운 여름에 셔츠 500장의 단추를 다 떼고 새로 달아야 하는 사고가 났어요. 하도 답답해 공장 밖에 나오니 어느 꼬마가 엄마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고 있더군요.” 그는 “꼭 성공해서 내 아이는 엄마 손 잡고 아이스크림 먹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1993년 어느 날, ‘배움의 고통은 잠시지만 못 배운 아픔은 영원하다’는 전봇대 광고가 가슴에 박혔다. 서울 회기동의 상록야학 문을 두드렸다. 새벽 신문 배달, 낮에는 공장, 밤에는 공부, 잠은 3시간. 신고(辛苦)의 하루 ‘4악장(樂章)’이 시작됐다.
야학 교사들은 이런 그에게 밝은 미래로 통하는 문을 안내해 주었다. ‘서울시 청년상’을 받게 했고, 1995년 11월에 삼정데이터시스템에 사환으로 입사시켰다.
컴퓨터를 만지는 직원들이 멋져 보였다. ‘종이 피아노’를 두드리는 불우한 피아니스트처럼, 회사 구석에 버려져 있던 ‘고장난 자판’을 들고 타자 연습부터 했다. 우연히 이 모습을 본 회사 사장이 “쉬운 컴퓨터 업무는 사환에게도 시켜보라”고 해 드디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후 “사장님에게 보답하려고” 월급 70만원 중 40만원을 헐어서 몰래 컴퓨터학원에 등록도 했다. 그때 회사 바로 옆 건물이 ‘IT 대기업’인 삼성SDS였다. 매일 출퇴근하며 “나는 꼭 저 회사에 들어간다”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다짐했다. 그리곤 컴퓨터에 더 매달렸다. 야학 공부에도 박차를 가해 1998년에는 중·고졸 검정고시에 모두 합격했다.
2000년, 드디어 이 회사가 채용 공고를 냈다. 박사·기술사 등등의 자격 요건 끝에 ‘경력 2년 이상 직원’이란 문구가 있었다. 원서를 넣고, 기술면접·인성면접·필기시험 등을 차례로 통과했다. 자는 시간까지 줄이며 갈고닦은 컴퓨터 실력이 주효했다. 당시 24세였던 권씨는 당당히 경력사원 중 최연소로 이 회사 정사원이 됐다.
2001년에는 경희대 지리학과(야간)에 합격했다. 맨손으로 상경해 봉제공장에서 먹고 잔 지 10년 만에 그는 대기업 정사원도 됐고, 대학생도 됐다.
입사 후 매년 2개씩 딴 자격증이 MCSE(마이크로소프트가 발급하는 시스템 엔지니어 자격증)·CCDA (시스코 제품군의 네트워크를 디자인·설계할 수 있는 자격증) 등 7개로, 팀 내 최다이다. 모두 영어로 시험을 친 국제 공인 자격증들. 올해에도 국제 자격증 2개에 더 도전할 예정이다.
그는 취미에서도 열과 성을 다한다. 인라인스케이트에 푹 빠져, 지난 2003년 한 신문사가 주최한 인라인레이싱 대회에서 1위, 한 방송사가 연 인라인마라톤대회에서는 8위를 차지했다.
이제 “최대한 많이 베풀며 살아보자”는 목표를 향해 달린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돈 많은 게 최고’였다. 하지만 작년 초, 돈에 찌들어 구겨진 인상(印象)과 늘어난 주름살을 거울에서 발견하곤 놀랐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 고생과 역정을 돈 몇 푼과 바꾼다면 얼마나 밑지는 장사인가” 하고 되물었다. 나중에 그는 조그만 사업이나 자영업을 해볼 생각이다. 돈이 좀 생기면, 2세 잘 키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 말고는 정말 필요한 이웃들에게 주고 싶다. “나같이 척박한 토양에서도 꽃이 피지 않았느냐”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청소년 상담 자원봉사도 해볼 생각이다 -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