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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건강연구소

예수님이나 다른 영적스승님들도 역시 채식주의자였는가?/

by 법천선생 2007. 9. 12.
예수님이나 다른 영적스승님들도 역시 채식주의자였는가?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듯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완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면 그 스스로도 또한 같은 사상(생각)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사상이란 무엇일까. 유태인과 크리스챤 전통은 인간과 다른 지각 있는 생명 모두를 위해 먹는 것에 관한 신의 원초적 가르침을 잘 담고 있다. 그 후에 나오는 성경의 여러 허가 사항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불충분한 점을 조정해 주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 그러나 태초의 신의 원초적인 기대는 명백했다.


“그리고 신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땅위에 있으면서 씨앗을 맺는 풀과 씨있는 과일이 달리는 모든 나무들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음을 유념하라. 너희에게는 그것이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들에게도 그 안에는 생명이 있는고로, 나는 그들의 먹거리를 위해 모든 풀을 주었도다. 그리고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Genesis 1:29)


그것은 신께서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역시 채식을 기대하신 것 같다.


이사야(Isaiah) 11:6 - 7.9 에도 있듯이, 예언가들은 인류가 다시 한 번 신의 지식을 받아들일 때는 이러한 종류의 삶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우리들에게 예언하고 있다.


“늑대가 또한 어린 양과 함께 살게 될 것이며, 표범이 염소새끼와 함께 누워있으며, 그리고 어린 송아지와 어린사자와 살찐 가축들이 함께 지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그리고 암소와 곰이 서로 젖을 먹이며 그 새끼들은 함께 누워 뒹굴 것이다. 그리고 사자는 암소처럼 짚을 먹게 될 것이며…, 그들은 모든 나의 신성한 동산에서 서로 다치게 하거나 죽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은 마치 물이 바다를 뒤덮고 있듯이, 주(Lord)의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스라엘 최고 랍비인 아브라함 이삭 하코헨 쿡은 채식주의야 말로 인류사이의 궁극의 평화, 동물계의 영원한 휴식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사야에서도 예언된 바와 같이 그는 또 예견하기를, 메시아 시대에서 우리는 모두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며, 우리에게 제공되는 유일한 먹거리는 채소의 기원이 되는 mincha라는 희생물일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호세아 2:18 - 20 에서도 유사한 얘기를 듣는다.


“그 날에 나는 들판의 짐승들과 하늘의 새들과 땅 위로 기는 것들과 함께 그를 위하여 하나의 맹약을 할 것이다 : 나는 활과 칼을 부러뜨리고, 이 땅으로부터 전쟁을 없앨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안전하게 내려놓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나에게 속하게 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너희를 나에게 속하게 하여 고결하고 사려 깊으며 사랑의 친절과 자비심 속에 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너희를 나에게 속하게 하여 믿음이 돈독하게 하리라; 그리고 너희는 주(Lord)인 나를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자비의 원칙은 붓다의 가르침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의 가르침 팔정도 중 네 번째, 정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첫째가 양심과 동정심을 갖고서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잘 되기를 바라며, 마음으로 창과 칼을 거두어들여 살생하지 않는다는 정신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깨달음이나 신을 아는 상태가 될 때, 모든 창조물들 안에 있는 평화스러운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것은 이미 신을 알고 깨닫게 된 예수나 다른 스승들이 먼저 신께서 예시하신 길인 자비와 사랑, 그리고 모든 생명체에 대한 동정심에 입각하여 살아오게 된 이유와도 합치되는 것이다. 그들의 가슴은 그 밖의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모든

만물을 은혜로 맞아 주시며,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 시편 145:9



몇몇 역사학자들은 예수님이 죽은 직후, 그의 남동생 James the Just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채식주의자로 양육되었다고 얘기한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모님이 James를 채식주의자로 키웠다면, 예수님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매우 극소수의 신학자들은 채식주의야말로, 그리스도 가르침의 영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더욱 알맞은 윤리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또한 많은 수도원들도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채식주의를 실천해 왔다.



“동물들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신의 창조물이며, 이용물도 아니고, 자원도 아니고, 소모품도 아니며, 신의 관점에서 모두가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들의 눈이 그 경탄스러운 십자가에 고정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무지의 고통에 대한 외경심을 이해해야만 하는 특수한 위치에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들 대부분의 모든 존재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방어력이 없으며, 무지의 고통 속에 있는 약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그리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신의 절대적 표상이다.” (Rev. Andrew Linzey)



가장 유명한 신약성서 장면 중 하나는, 예수님의 유일한 적극적인 국법 불복종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는 “나의 집은 기도의 집으로 불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곳을 도둑들의 소굴로 만들었구나.” (mat 21:12-13) 라고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의 사원으로부터 성인들과 수전업자들을 몰아낸다. 이들 상인들은 종교의식의 제물로 쓰기 위한 동물들을 팔고 있었고, 그것은 대개 육식과 관계되는 일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샤야, 여호수와,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존재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예언적인 전통에 속한다. 그들은 대개 생명에 대해서, 그리고 무지의 고통에 대한 혐오에 대해서 언급했다. 다른 문맥에서 예수님은 그 주제에 대해 신의 원래 가르침을 주지시키기 위한 여호수와의 주장을 종종 예로 들면서 “나는 자비를 원한다. 희생물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했다.



이샤야는 무지하고 감각적인 삶을 취하는 것에 대한 신의 싫어함에 대해서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소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자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자와 같다. 양을 잡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자는 개의 목을 부러뜨리는 자와 같다. 부어 드리는 제물을 바치는 자는 돼지의 피를 바치는 자와 같다. 분향을 드리는 자는 우상을 찬미하는 자와 같다. 이러한 제사장들은 나의 뜻을 묻지 않고 제 뜻대로 한 자들이다. 오히려 가증한 우상숭배를 즐겼다. 가증한 우상들을 진정으로 좋아하였다." (이샤야 66:3)



동물을 죽이는 행위는 분명히 신의 뜻은 아니다. 예수님은 신과 같은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원에서 적극적인 공적활동을 하면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피력했다.

그것은 결국 로마 행정 당국의 주의를 끌게 했고, 급기야는 일주일 후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고야마는 사고가 되고 말았다. 그의 가장 공적인 행동 속에서 나타난 음식 문제, 그리고 동물에 대한 윤리적인 대우 문제, 그리고 그의 삶의 최종적인 희생 등을 놓고 볼 때, 그 의미는 매우 크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예수님은 그의 메시지 상에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에 그의 생명을 걸어야만 했는가?”
통상적인 하나의 질문 : 그리스도도 영적인 스승인데 그는 물고기를 먹곤 했다. 왜 산트 타카르 싱 스승께서는 그것을 금하시나?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근래의 작가들은, 그 당시의 빵은 물고기 형태로 종종 만들어졌다고 말한다.(마치 붕어빵처럼) 몇몇 작가들은 빵, 과일, 물주전자의 기적에 관한 하나의 전설 같은 얘기로써, 어떤 빵덩이와 물고기에 관한 기적을 담은 이야기를 번영해 냈다. :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과일과 빵, 그리고 또한 물을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먹고 마시고 만족해했다. 그리고 그들은 경탄했다. 그들 각각은 많은 것으로 나뉘어졌으며, 그것들은 사천명에게 돌아가는 양이 되었다.”



이 이야기에 관한 제임스 왕의 번역도전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일곱 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물고기가 몇 마리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를 들어서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마태복음 15:34-36)



예수께서 물고기를 가지고서 한 행동(그것을 여러 개로 만든 것)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보통 빵은 여러 조각으로 만들 수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들은 먹을거리가 얼마나 있느냐’고 묻지 않고, 단지 빵이 얼마나 있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이 사실에서 본다면, 그 기적에 관한 언급들은 여러 개로 나누어진 그 먹거리로서 오직 빵만을 지칭한 것이다.



성경을 예수님께서 직접 그의 손으로 쓰신 것이 아니므로, 어떤 것이 추가 된 것이고, 빠진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순수한 원래의 가르침에서 각색된 것인지 분류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사랑과 연민심으로 충만한 최고의 스승이셨다. 그러므로 그 자신의 창조물을 집어 삼키고, 그 신성한 계율들을 어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 당신께서는 살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많은 구절도 명백하게 채식을 지시하고 있다.



“술독에 빠진 사람과 고기를 탐내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마라.” 잠언 23:20

“고기를 먹는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그 밖에 무엇이든지, 형제나 자매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로마서 14:21



성 바울 뿐만 아니라, 세례자 요한, 예언가 다니엘, 그리고 기독교 초기의 교회 아버지들도 모두 채식주의자였다.(알렉산트리아의 Origenes와 성 Clement, Assisi의 Francis, Jesus의 성 Therese, Porres의 성 마틴, 그리고 초기 수도원 율법 등)



어떤 영적인 스승, 신을 깨달은 영혼이 남의 생명을 취하여 고통과 죽음의 과일을 즐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경전들은 먹는 것을 비롯한 모든 것으로부터 단순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맛의 중독과 무분별한 식탐으로부터 무관심하게 해 주는 가르침들을 주고 있다.
‘명상하면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알고 있는데, 이 명상을 배우기 위해서는 왜 고기 먹는 것을 중단해야만 하는가?’



고기를 먹는 것을 허용하는 명상 시스템은 신성한 우리의 근원과의 영적인 합일에 그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평화나 정신능력의 발전과 같은 좀 더 덜한, 그 아래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순수한 채식 음식은 이상적인 건강상태를 유지시켜주고 육체의 균형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이 올라가는 것을 더욱 쉽게 해준다.



채식이 가장 적은 카르마를 짓는 것이 되고 가능한 한 가장 적은 시간 안에 과거 카르마의 빚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산트마트에서는 채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동물을 살생하고 먹는 다는 것은 크나큰 카르마가 되어서, 질병과 고통으로 갚아야만 하며, 그리고 그것은 영혼의 해방을 가로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