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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건강연구소

[스크랩] 채식의 계율과 자비정신

by 법천선생 2007. 9. 13.
채식의 계율과 자비정신

보적 김지수(전남대 법학과 전임강사)


그 어느 종교철학보다도 가장 치밀한 이론적 체계를 가지고, 최고로 철저한 채식을 적극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불교일 것이다.

불교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깨달음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皆有佛性)는 절대적인 평등관과, 모든 생명이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바란다는 자비심에 기초하여, 살생 금지를 첫번째 계율戒律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채식론을 뒷받침하는 이론적인 근거 가운데 가장 독특한 사상은, 아마도 생명의 윤회 및 그 과정에서 전개되는 인과응보의 법칙일 것이다.

모든 생명이 지니는 불성佛性, 즉 영성靈性, 靈魂은 영원불멸하면서, 끊임없이 천상天上ㆍ인간人間ㆍ아수라阿修羅ㆍ축생畜生ㆍ아귀餓鬼ㆍ지옥地獄의 6도六道를 윤회한다. 그 윤회 과정에서, 개개의 생명체는 자기가 생전에 행한 선악 행위에 상응하는 업보業報를 받게 되고, 또한 그에 따라 다음 생명(來生)의 형태와 고락苦樂의 정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 사람이 다른 생명을 살상할 때에는, 자신이 지닌 불성, 즉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잠재의식에 각인刻印되어, 죄의식과 공포감을 형성한다. 한편, 피해자인 상대방은 가장 소중한 생명을 상실 당하는 순간, 극도로 억울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품게 된다. 그 원한怨? 舅?심기心氣가 골수에 사무칠 뿐만 아니라, 천지까지 진동시키게 된다. 그런데, 그 원한이 자연 법칙(윤회)의 주재자主宰者인 신명神明의 심판을 통해, 가해자에게 보복의 형벌로 시행되는 것이다.

현재의 자연과학으로 말하자면, 본인의 잠재 의식적인 공포감으로부터 발생하는 혼잡스런 파동波動에다, 피해자의 원한과 분노가 내뿜는 강렬한 살기殺氣의 파동까지 가해자의 심령에 전파되어, 서로 심한 간섭 현상을 일으킨다. 그러기 때문에, 그 영혼의 파동은 극도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불협화! 음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리하여 죄악을 범한 자는, 평소에 만사가 순조롭지 못하고, 시련과 고통이 늘상 그림자처럼 따른다. 밤에 잠자리조차 불안하여 두 발도 제대로 뻗지 못하고, 심지어 악몽에 가위눌리거나 등골이 오싹하도록 식은땀을 흘린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 잠재의식의 공포감과 피해자의 원한이 한! 꺼번에 몰려들어, 그 영혼의 내생을 결정하는데, 암울한 타락 쪽으로 유도하게 된다.

이러한 인과응보론을 믿는 불교의 입장에서, 다른 생명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라도, 감히 중생을 살상하고 그 육신(시체)를 먹는다는 일이 도대체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필자가 소년 시절에 직접 목도한 경험을 참고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향 동네에 소, 돼지, 개, 닭을 도살하여 생업으로 삼는 백정白丁이 있었다. 칠순이 넘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이미 장년이 된 그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함께 하였다. 특히 설날과 추석 같은 명절 때면, 고기 수요가 성황을 이루기 때문에, 그들의 도살 작업도 더욱 바빠지고, 피살되는 동물의 비! 명과 그 뒤에 풍기는 피비린내도 비례적으로 증대되곤 하였다. 그런데, 그 백정 부자父子가 거리를 다닐 때면, 어떻게 아는지 수많은 개들이 무리를 지어 그 뒤를 따라다니며 심하게 짖어대곤 하였다. 그 백정 노인은 허리가 약간 굽은 것을 제외하고는, 시종 건장한 체력을 유지하였으며, 그가 아파 누웠다는 이야기는 좀처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참으로 묘하고 비참하게 들이닥쳤다. 어느 날 밤 집에서 잠자리에 잘 들었는데, 이튿날 아침에 갑자기 자취가 보이지 않은 것어었다. 나중에 다방면으로 수소문하고 수색한 끝에, 집에서 2km나 떨어진 바닷가 개펄 골짜기에서 시체를 찾았다.

거기는 본디 깊숙한 해안의 만灣을 멀리 돌아다녀야 하는 이웃 마을을 연결하기 위해, 해조海潮 흐름이 드나드는 개펄 골짜기에 다리를 세운 곳이었다.

평소 멀쩡하던 노인이, 마치 몽유병夢遊病 환자처럼 한밤중에 일어나,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잠옷 차림으로 추운 밤거리를 오리五里나 걸어, 하필 바다 개펄 골짜기에 세운 다리 위에 이르러, 아래로 추락하여 사망한 것이다.

이 사건을 보고, 주위의 모든 사람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그가 임종에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지금까지 도살한 온갖 가축의 원혼怨魂들한테 유괴 당하여, 그처럼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다고 혀를 끌끌 찼었다.

능엄경楞嚴經은 육식의 인과응보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이 양을 잡아먹으면, 양은 죽어서 사람이 되고, 사람은 죽어서 양이 되어 그 원한을 갚는데, 중생은 이렇게 생사를 반복하면서 서로 잡아먹는 일을 계속한다.“

이러한 인과응보의 윤회는 개인적인 살생의 경우, 한 사람의 업보로 나타난다. 하지만, 한 가족이나 한 사회, 국가 단위의 공동 행위로 저질러진 죄악의 경우에는, 그 공동업장共同業障이 살겁殺劫 또는 도병겁刀兵劫이라는 전쟁까지 초래하게 된다.

예컨대, 당唐나라 때 유명한 한산寒山 대사의 선시禪詩에는, 이런 사연도 적혀 있다. 세간의 한 집안에서 신부를 맞이하여 혼례를 올리고 잔치를 베푸는데, 그 신부가 본디 신랑의 할머니였고, 연회석에 앉아 주육酒肉을 먹는 빈객들은 과거 그 집의 가축이었으며, 현재 솥 안에 요리된 고기들은 모? ?그 가문의 친족들이 환생還生한 것이었다고 한다. 중생이 육도를 윤회하면서도 인과 법칙을 모르고, 서로 잡아먹으면서 그리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생의 어리석음(無明)에 대해, 한산 대사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면서, 또 이렇게 비탄의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육도의 윤회가 슬프기 짝이 없구나. 손자가 할머니를 신부로 맞이하고, 소와 양이 상석에 앉았는데, 여섯 친족이 솥 안에서 끓고 있네 그려. (육도윤회고六道輪廻苦, 손아취조모孫兒娶祖母, 우양석상좌牛羊席上座, 육친와내자六親鍋內煮.)“

그리고 자수 선사慈壽 禪師는 이런 게송偈頌을 읊기도 했다.

“세상에 살생이 많아서, 마침내 창칼이 겁탈이 일어나네. 목숨을 빚졌으면, 그대 몸을 죽이고, 재물을 빚졌으면 그대 집을 불사르네. 그대 처자가 흩어지는 것은, 일찍이 그의 둥지와 집을 파괴한 때문일세. 인과응보는 각기 서로 부합하는 법이니, 귀를 씻고 부처님 말씀이나 들어보소! (세상다살? 訖╅았屹?? 축유도병겁遂有刀兵劫; 부명살여신負命殺汝身, 흠재분여택欠財焚汝宅; 이산여처자離散汝妻子, 증파타소혈曾破他巢穴. 보응각상당報應各相當, 세이청불설洗耳聽佛說.)“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유리왕琉璃王이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부처님의 조국인 가비라위국迦毘羅衛國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몸소 유리왕을 찾아가 평화적인 해결을 강구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석가족釋迦族 인민에게 자위적인 방어만 취하! 고, 공격은 하지 말도록 분부하였다.

유리왕은 군대가 성안에 침입하여 도처에서 인민을 살륙하므로,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위대한 신통력을 발휘하여, 석가족 5백인을 바루(?) 하나에 담아 천궁天宮에 피난시켰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바루를 내려와 열어 보니, 사람은 간 데 없고 핏물만 흥건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목련존자가 ? 光낫途?그 연고를 여쭈어 보자, 부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아주 오래된 과거에 이곳에 큰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 안에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어느 큰 명절에 마을 사람들이 연못 안의 물고기를 몽땅 잡아다가 먹었다.

그 중 큰 물고기 한 마리도 잡혔는데, 한 어린애가 물고기는 먹지 않으면서도, 재미로 막대기를 들어 그 물고기 머리를 세 대 때렸다. 그 때의 큰 물고기가 지금의 유리왕이고, 작은 물고기들은 현재의 유리왕 군대인데, 마을 사람들은 지금 그들에게 피살된 석가족이다. 그때 물고기는 안 먹고 그 머리를 세 대 때리기만 했던 어린애가 바로 나(부처님)인데, 나는 물고기를 먹지 않아 피살은 면했지만, 물고기 머리를 세 대 때린 죄로 지금 머리가 사흘간 아픈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장경(地藏菩薩本願經)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과거 무수한 세월 이전에 청정연화목여래淸淨蓮華目如來라는 이름의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때 한 아라한阿羅漢이 매우 열심히 불법佛法을 전하고 있었다. 광목光目이라는 한 여자가 이 아라한을 정성껏 공양하자, 아라한은 그녀에게 무슨 부탁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그 여자는 이렇게 청했다.

“우리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날에 내가 공덕을 쌓아서 어머님의 고통을 풀어드리고 싶은데, 현재 우리 어머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그녀를 동정하여, 이내 선정禪定에 들어가 그녀의 모친을 찾았는데,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고 있음을 알았다.

아라한이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의 어머님은 생전에 무슨 중죄를 범했기에, 사후에 이렇게 큰 업보를 받는 것이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답변했다.

“우리 어머님은 생전에 물고기를 가장 즐겨 먹었는데, 특히 그 알을 좋아해서 무수한 생명을 죽였습니다.“

이에 아라한은 그녀에게 청정연화목여래의 명호名號를 정성스럽고 간절히 외우며, 그 불상佛像을 조각하여 모시면, 산 사람과 죽은 자 모두에게 크게 이롭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 여자는 지옥의 중생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모두 제도하여 지옥이 텅 비기 전에는, 자신이 결코 성불? 頹例舊?않겠다는 큰 서원誓願을 굳게 발하였다.

바로 그 분이 그토록 유명한 지장보살地藏菩薩님이시다.

살생의 죄악에 대한 업보는 이처럼 엄청나다.

화엄경華嚴經에 의하면, 살생한 자는 반드시 지옥ㆍ축생ㆍ아귀의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 천벌을 받는다.(이를 정보正報라고 함) 그리고 삼악도의 업보가 끝나면,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여, 단명短命과 질병의 양종 업보를 더 받는다.(이를 여보餘報라고 함)

그러면 자신이 직접 살생하지 않고, 남이 도살한 고기를 사 먹으면, 인과 응보를 받지 않을 것인가?

특히 요즘 같은 대량 소비의 산업 사회에서는, 전문 도살업자가 따로 있고, 육류의 유통 체계도 매우 복잡하다. 그래서 도살업자는 고기를 직접 먹는 사람에게 살생의 책임을 전가하고, 소비자는 또한 도살하여 판매하는 사람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거나, 그 고기가 자기만을 위해 도살한 것이 아님! 을 애써 변호하려는 심리적 경향이 강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른바 세 가지 깨끗한 고기(三淨肉)는 먹을 수 있다는 방편법문(方便法門)이 주장되기도 한다. 세 가지란, 자신의 눈으로 그 살생(도살)하는 장면을 보지 않은 고기, 나를 위해 살생했다고 듣지 않은 고기, 나를 위해 살생했다는 의심이 없는 고기가 그것이다. (이밖에도 九淨肉의 ? 납莪?있다) 그렇게 되면, 현대 산업 사회에서 전문 도살업자에 의해 도살되어 대량으로 판매되는 고기를 사 먹는 경우, 이러한 깨끗한 고기라는 명분을 얻어 육식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목적과 동기를 엄격히 실질적으로 분석해 보면, 전문화된 도살 업자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위하여' 영리 목적으로 가축을 살생하여 상품으로 제공한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은 적어도 그 고기가 '자기를 포함한' 다수의 소비자를 '위하여' 도살한 것임을 인식하고 구입한다. 그러기 때문! 에, 범죄와 형벌에 관한 법의 이론에 의하면, 적어도 미필적 고의(未必的 故意)는 존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일반 시중에 판매되는 상품용 고기는 '깨끗한 고기'(淨肉)가 될 수는 없는 셈이다.

더구나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양자 모두 살생의 죄악을 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능가경(楞伽經)에 다음과 같은 훈계가 명백히 나오기 때문이다.

“이익을 위해 중생을 살해하는 자, 재물로써 고기를 사먹는 자나, 양자 모두 죄악의 업보를 받아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다. 만약 시키거나 구하지 않는다면, 세 가지 깨끗한 고기(三淨肉)도 없을 것이니, 이 모두가 원인이 없지는 않으므로, 마땅히 먹지 말아야 한다.“

능엄경(楞嚴經)에서도 “육식하는 사람은 죽어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 무한한 고통을 받는다“고 경고한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타인의 손을 빌린 간접 살생도, 직접 살생한 죄악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는 업보를 받는 것이다.

특히 육식자가 현세(現世)에 살아 있는 동안 받게 되는 업보도 적지 않다. 세상살이서 만사가 형통하지 못하고 순조롭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능엄경에서는 “육식하는 사람은 공덕을 하나도 성취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육식하는 사람은, 천상에서 그를 멀리 물리치고, 중생도 그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에서는 또 이렇게 상세히 경고한다.

“무릇 피와 고기는 모든 신선이 팽개치고 뭇 성현들이 먹지 않기 때문에, 육식하는 자는 모두 천상에서 멀리 물리친다. 입에서는 항상 악한 냄새와 기운이 나는데, 고기는 좋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모든 죄악만 낳을 뿐 아니라, 모든 공덕을 파괴시킨다. 그러기 때문에, 뭇 신선과 성현들이 육식하는 자를 멀리 물리치는 것이다.“

즉 육식하는 자는 천상 신명 세계의 가피나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일상 생활의 모든 일이 시련과 장애로 점철되며,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반 세속인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마음을 닦아 불성(佛性)을 깨치고 도업(道業)을 성취하려는 수행자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보리심(菩提心)을 잊거나 상실하고서 각종 착한 법(善法)을 닦는다(修行)는 것을 일컬어 마업(魔業 : 악마의 수행)이라고 한다.“

이는 화엄경에 나오는 잠언인데, 육식에 대한 정문일침(頂門一針)의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남방의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는, 수행하는 승려들의 음식을 특별히 금하는 계율(戒律)은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一切唯心造)는 문자적인 형식 논리에 따르면, 그럴듯한 명분도 선다. 그러나 중생의 절대 평등과 중생에 대한 자비(慈悲)의 보살행(菩薩行)을 중시하고, 경우에 ? 蕙撰??중생을 위해 자신의 도업(道業)과 생명까지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무외보시(無畏布施)의 수행을 실천하는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음식에 대한 계율이 상당히 엄격하다.

대승경전(大乘經典)에는 이른바 '깨끗한 고기'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열반경(涅槃經)에 보면, 가섭(迦葉)이 부처님께 이렇게 여쭙는 대목이 나온다.

“어찌하여 처음에는 세 종류의 깨끗한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허락하셨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다.

“이는 상황에 따라 점진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모든 육식을 끊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육식이 자비심의 종자를 단절시키기 때문에, 수행자는 육식을 완전히 금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요컨대, 성문(聲聞) 수행을 하는 소승(小乘)의 경우, 부처님 생전에는 점진적인 수행을 권장하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제한적인 육식을 허용했지만, 열반 이후에는 일체 육식을 금지했다. 그리고 보살(菩薩) 수행을 하는 대승(大乘)의 경우에는, 부처님 생전부터 애당초 육식을 완전히 금했다.

능가경(楞伽經)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이는데, 특히 다음과 같이 예언하신 내용이 눈에 띈다.

“미래의 세상에 어리석은 자들이 계율을 망령되이 언급하며, 정법(正法)을 어지럽히고 나(부처님)을 비방하면서, 내가 육식을 허락했다고 말하며 자신도 먹을 것이다.“

적어도 불경 상으로는, “저절로 죽은 것이든 피살된 것이든, 무릇 고기는 모두 단절해야 한다.“는 것이 수행자들의 기본 계율인 셈이다.

육식과 관련하여 논란되는 것으로, 고기와 함께 요리된 주변의 채식, 이른바 '육변채 (肉邊菜)'의 문제가 있다. 열반경에는 가섭이 부처님께 이렇게 여쭌 대목이 나온다.

“걸식(乞食)할 때에 고기가 섞인 음식을 얻으면, 어떻게 먹어야 합니까?”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고기를 가려내고 물로 깨끗이 씻은 다음 먹어야 한다.“고 대답하셨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우리 현실에서 음식을 직접 탁발(托鉢)하는 일도 거의 없다. 하지만 요리마다 육식이 섞이지 않은 것이 드문 현실에서, 채식주의자가 외식(外食)해야 할 경우에 더러 참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채식 전문점이 보편화된 대만(臺灣) 같은 곳에서는, 출가 수행자 뿐만 아니라 세속의 신자들도, 되도록이면 청정한 완전 채식을 먹는다. 그리고 계란을 비롯한 각종 조류의 알도, 본래는 생명이 잉태된 것으로서 육식에 포함된다. 그런데 근래에는 수정(受精)되지 않은 사육 계란에 한해서, ? ?걷?우유처럼 채식자도 먹을 수 있다고 허용하는 수행 단체가 없지 않다. 물론 승려나 엄격한 채식을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수정되지 않은 계란도 금지된다.

마지막으로, 채소이면서 채식에 포함될 수 없는 특별한 예외가 있다. 매운 맛을 내는 마늘, 파, 양파, 부추 등의 오신채(五辛菜. 또는 五?菜라도고함)가 그것이다.

오신채를 금하는 이유에 대하여, 능엄경(楞嚴經)은 이렇게 적고 있다.

“어떤 중생이든지 삼매(三昧)를 구하려거든, 마땅히 세간의 오신채(五辛菜)를 끊어야 한다. 이 오신채는 익혀 먹으면 사음(邪淫)한 욕망(性慾)을 자극하고, 날(生)로 먹으면 분노(화)를 돋군다. 그래서 만약 이러한 매운 채소를 먹는 사람은, 설령 모든 경전을 설법한다고 할지라도, 시방(十方) 세계의 모든 신선과 부처들이 그 매운 냄새를 싫어하여, 멀리 피하게 된다.“

유가적 전통에서도, 천지 신명이나 조상 귀신께 제사 지내는 음식에는, 파나 마늘 고추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데, 불교의 오신채 이치와 일맥 상통하는 바이다. (神明과 귀신은 냄새(香氣)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다만, 후대에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고추는 오신채에 명문(明文)으로 포함되지 않아! 서, 우리 나라에서는 수행자들도 대부분 먹는 것 같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산동(山東)이나 사천(四川) 등 일부 지방의 요리를 제외하고는 고추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특히 수행자나 채식자들은 고추를 대체로 입에 대지 않는다.

고추는 그 성질상 강렬한 매운(辛) 맛을 분명히 지니고 있으며, 사람의 성질을 쉽게 흥분시키고, 시비 분쟁 내지는 투쟁심을 자극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탐욕·분노·어리석음(貪瞋癡)의 삼독(三毒)을 깨끗이 씻어 청정한 해탈을 이루고자 하는 불교의 수행 정신에 비추어 보면, 고추도 가급적 먹지 않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유가의 제사에서도, 어류에 실고추를 조금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김치와 같이 고춧가루가 든 음식을 제수祭需로 올리지 않는데, 제사 전 사흘간 행하는 목욕재계沐浴齋戒에도 제사 지내는 사람이 이러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
출처 : 소금인형
글쓴이 : 소금인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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