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칭기스깐학습법

칭기스깐학습법에서 징기스칸에 대하여 말하다

by 법천선생 2012. 5. 9.

1995년 말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신문인 워싱턴 포스트지는 세계사에서 지난 1천년간 가장 리더십이 가장 훌륭했던 인물로 징기스칸을 꼽았다고 합니다. 징기스칸은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혹독한 인생의 쓴 경험을 많이 하여 자기의 습관을 철저히 통제하는 자기절제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가 회고하길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동네마을에서 버림을 받고 괄시를 당하여 쫓겨났으며, 먹을 것이 없어 들판에서 생쥐를 잡아먹고 연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합니다. 후에 겨우 직업을 가졌는데 그것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에서 싸움을 하는 군인이었습니다. 별다른 친구도 없었으며 그의 나라 몽골은 중국 전체로 보면 병사도 아주 적어 10만 명이었으며 국민은 2백만 명밖에는 안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나라는 글자도 없었고, 그는 배운 것이 없어 글을 몰랐다고 합니다. 한 때에는 목에 칼을 쓰고 탈출을 하여 살아났으며 전쟁을 하다가 얼굴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가 살아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큰마음을 가지고 있던 그는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다고 판단하고는 지저분하고 잡스러운 마음의 찌꺼기를 과감하게 내버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철주철미한 자기절제를 통하여 민족을 통합하여 징기스칸이 되었다고 합니다.


징기스칸은 현실에 적응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철저한 현실주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잘 적응하기 위해 몽골인의 부족함을 다른 인종의 우수한 사람을 발탁하여 우대하고 그들의 조언을 듣고 현명한 판단을 하였습니다. 또한 상인들을 보호하여 오늘날과 같은 유통 체제를 활성화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몽골군이 가는 데는 항시 상인들이 들끓었고 몽골군은 그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징기스칸은 비록 글자를 읽을 수 없었으나 현명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바른 판단을 내렸습니다. 점령지역의 지도자들을 우대하고 그들의 신분을 보호해 주고 또한 그 지역의 종교 활동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아랍에서는 코란경전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여 경청했으며, 중국의 도교 철인 장춘(張春)진인 구처기의 말을 경청하기도 했습니다. 요나라 왕족 출신인 몽골의 재갈공명이라 칭하는 야율초재를 정치고문으로 등용하여 행정을 담당하도록 하여 도시 점령 후 파괴보다 규칙적인 행정으로 다스리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을 설명하자 바로 그렇게 하도록 조치했다고 합니다. 그는 결심권자로서 뛰어난 판단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징기스칸은 거란인 야율야해에게 공로를 인정하여 만호(뒤에 요왕으로 임명)를 부여했고, 금나라를 섬기는 페르시아인 알라와디(阿刺而思) 에게는 재정업무를 맡겼습니다. 그가 점령지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에 귀순한 우수한 인재는 발탁하여 활용할 줄 아는 혜안(慧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징기스칸이 큰 야심을 지닌 대정복자라고 하지만 실제 징기스칸은 어려서부터 생존하기 위해 현실에 적응해나가는 소양을 터득하고 이를 발전시켜 나아갔다. 몽골 통일 후 금나라가 부당하게 조공을 요청하자 금나라 정벌에 나섰고 여기서 중국의 보병전과 요새전을 터득하고 무카리로 하여금 중국의 병법을 배우도록 했다. 오트라르성주가 대상을 죽이고 사신에 대해 무례한 행위를 하자 호라즘국을 침입했고 이 나라를 정복하자 즉각 전과 확대를 하였다. 이때 역시 현지인을 최대로 활용하였다. 서하왕 이현이 배반하자 서하를 공격하다가 몸을 다쳐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도 서하정벌 계속했다. 그는 서하왕의 배신을 철저히 응징하는 반면에 금나라를 정벌하는 원대한 계획을 실천하면서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전술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인사에도 탁월한 재능을 지닌 지도자였다. 징기스칸의 사람 다루는 법은 오늘의 기업인들이 연구해 볼만한 과제다. 징기스칸은 철저히 능력위주의 인사를 했다. 귀족과 천민을 가리지 않고 능력만을 기준으로 지위를 부여했으며 그의 친척이라 해도 무공을 세우지 않으면 인정사정 없이 계급을 깎아 내렸다. 또 자기의 적이라 해도 인재로 생각되면 과감히 등용해 제베와 같은 명장을 발굴했고 몽골의 제갈공명으로 불린 야율초재 같은 인물을 재상으로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용서가 무엇인가를 아는 인간적인 관대함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적에게 강간당한 아내를 불문에 부치고 데리고 산 것과 강간에서 태어난 맏아들을 친아들로 공식 선포한 사실이다. 이 같은 처세는 오늘날에도 힘들지만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관용이었다. 그러나 징기스칸은 싸움터에서는 무자비했다. 항복하면 받아들였지만 저항하면 성내 모든 남녀노소를 살육하고 불을 질러 초토화시키는 잔인함을 보였다. 그의 전투비결은 속전속결이었다. 적의 예상보다 훨씬 앞질러 진격하는 군사이동을 통해 적이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이 전술사에서도 유명한 ‘징기스칸 전법’이다.

'칭기스깐학습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트 필기할 때 활용되는 약호법  (0) 2012.05.11
기억하는 방법들  (0) 2012.05.10
초인지학습  (0) 2012.05.08
우리아이 영재로 키워보자   (0) 2012.05.08
나에게 천재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달라  (0) 2012.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