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용서의 언덕”이라는 뜻의 페르돈 봉우리(Alto de Perdon)를 향해 걷는다. 마지막 급경사를 오를 동안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고 땀이 쉴 새 없이 흐른다. 심장이 힘차게 박동하고 왕성하게 혈액이 순환하고 온몸의 근육과 내장의 움직임까지 느껴진다. 걷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 피부를 간질이는 바람이 얼마나 고마운지, 풀 향기가 그렇게도 감미로운 건지, 새소리가 저렇게 청아한 건지 온몸의 감각기관이 반응하는 것을 느낀다. 걷는 동안 일어나는 몸의 변화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다. 이런 생명력이 내 안에 약동하고 있었다니 놀라움의 연속이다.
드디어 페르돈 봉우리, “용서의 언덕”에 올라왔다. 순례자들이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묵묵히 걷는 조형물이 철로 만들어져 있다. 말을 타고 가거나 나귀를 끌거나 조랑말을 타는 사람, 걷는 사람들의 모습 등 순례자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여기에 오른 사람들은 곧장 예술작품에 자신을 감정 이입하게 된다. 관객이 하나 되는 조형물을 만든 아티스트는 대성공이다.
명색이 ‘용서의 언덕’이라 쉬면서 용서할 것이 무엇인가 어쩔 수 없이 되짚게 된다. 용서하지 않을 자유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도 모두 나의 것이라는 어떤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다른 어떤 존재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이다. 어디선가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바람에 실려 날아간다.
오늘의 목적지 푸엔테라레이나까지 남은 여정이 세세하게 표시된 표지판을 훑어보고 내려갈 채비를 한다.
오르던 방향과 반대로 내려가야 해서 일단 까미노 표지부터 찾는다. 앙증맞게 작은 표지석 주위에는 동글동글한 돌들이 아기자기 모여있다. 돌이 왜 많을까 갸우뚱하며 내리막길로 고개를 돌리고 보니 하산하는 길은 가히 신세계(?)다. 내려가는 길이 일부러 트럭으로 실어다 쏟아 부은 것 같은 자갈길이다. 어떻게 이런 자갈길이 있을까 싶지만 그건 초보 순례자의 짧은 소견일 뿐, 이런 길도 있다. 얕은 경험의 깊이로 뭘 상상하거나 기대하지 말자는 다짐이 절로 든다.
자갈길을 헤쳐 조심조심 내려가는 중에, 하나 있는 벤치에 앉아 손을 흔드는 두 사람이 보인다. 다가가 보니 까미노 첫날 만났던 리처드와 케이트다. 리처드가 걷는 것을 싫어해서 한참 뒤쳐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발 빠르게 먼저 페르돈 봉우리에 도착해 있다. 얘기를 듣고 보니 그들은 걷느니 마니 또 티격태격하다가 팜플로나에서 지나가는 차를 세워 타고 온 것이다. 방법이야 어쨌든 목적지에만 이르면 된다는 게 느긋한 리처드식의 해설이다. 다시 차를 타지 않고 그나마 하산하는 이 자갈길로 접어들었으니 이 부부도 여기부터 적어도 다음 마을까지는 걸어서 갈 것이다. 리처드와 케이트에게는 용서의 언덕은 그냥 페르돈 봉우리일 뿐, 그들이 넘어야 할 용서의 언덕은 따로 있는 것 같다.
간신히 경사 급한 자갈길을 내려오니 평지의 흙길로 접어든다. 지압하는 것처럼 아프던 발바닥이 훨씬 편해진다. 흙과 돌만 섞여 있는 이 길이 비단길처럼 느껴지고 있으니 경험이란 참 상대적이다. 앞서 걸어가는 네 사람은 영국과 캐나다에서 온 60~70대의 노부부들이다. 평소에도 트레킹을 자주 하시는 듯 걸음걸이도 힘차고 늘 웃으며 다니시는 사람들인데 길에서 자주 만나니 꼭 인사하고 지나가게 된다. 미소를 잃지 않고 까미노를 함께 걷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이 오늘 감탄했던 풍경보다 더 아름답다.
출처 : http://media.daum.net/life/outdoor/travel/newsview?newsId=20151218101807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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