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수시로 만나게 되지만,
죽음을 자기 자신의 문제,
자기 자신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로 심사숙고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인들은 자동차 사고라든가 불치병 등에
대해 대비하기 위해 보험을 든다든가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기는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자신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죽음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 조차 갖지를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죽음은 알게 모르게 타부, 금기가 되어있다.
우리는 죽음을 일상 대화의 주제로 올리기를 꺼린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부정해
함께 나누었던 삶의 시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인간적인 대화가 가능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겠는가.
누구든지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므로,
죽음을 자기 삶의 일부로서 수용해 주위사람들과
함께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어야겠다.
마치 두려움이 죽음 자체로부터 연유되기라도 하는 듯이
죽음은 두려운 현상이라고 사람들은 섣부르게 단정한다.
만일 누구나 죽음을 두렵게 생각한다면,
죽음은 응당 두려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두렵게 여기는 것일 뿐이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두려움은 죽음 자체로부터 연유한다기보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와는 반대로, 죽음을 생각하면 삶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알게 되므로, 주어진 삶의 시간을 더욱 의미있게
살고자 애쓰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임사체험을 겪은 사람 모두는 이전 보다
자기 삶을 보다 충실하게, 삶과 죽음을 한층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 허무하니까 삶에 소홀하게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죽음을 수용하자는 것은 결코 삶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자살은 생명을 살상하는 행위로, 불교의 제1원리 불살생의
계율을 범하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오해가 바로
“죽으면 다 끝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다. “
죽어버리면 되는 게 아니냐”는 생각에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달라이라마에 따르면,
“죽음이란 옷을 갈아입는 과정”일 뿐이므로,
영혼이 육신의 옷만 벗는 것이다.
육신의 옷만 벗는 것일 뿐 영혼은 새로운 세상으로 떠난다.
퀴블러로스 박사는 죽음에 직면한 어린아이를 향해
다음같이 말했다.
“우리 몸은 번데기와 마찬가지이다. 죽으면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나비처럼 예쁘게 날아서
천국으로 날아간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죽으면 끝이라는 오해에는 죽음으로써 삶과 단절하겠다는
기대도 깔려있다. 우리의 삶, 죽어가는 과정, 그리고 죽음 이후
세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어제는 이미 지났으므로 죽음에 해당된다면,
오늘 우리는 살고 있으므로 삶에 해당된다.
어제 우리의 삶은 사라졌지만, 어제의 삶은 오늘의
삶에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자기존재와 오늘의 자기 자신이 단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제의 삶과 오늘의 삶의 연결을 전제로 해서
우리 존재는 성립되는 것이다.
첫째 삶과 관련해 생각해보면, 죽음준비는 삶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주어진 시간을 보다 의미있게 살라는 말이다.
둘째 죽음과 관련해 말하면, 죽음은 갑자기 찾아올 수 있으니까,
죽음이 불현듯 찾아오더라도, 편안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평소에 준비를 하자는 뜻이다.
따라서 죽음준비는 주어진 삶의 시간을 보다 의미있게
영위함으로써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이자는 의미이므로,
죽음준비는 죽을 각오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한 마디로
삶의 준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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