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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의욕자극

눈보라 속의 약속, 오세암의 기적

by 법천선생 2026. 5. 7.

깊고 험한 겨울의 설악산.

하얀 눈은 산등성이를 덮고, 바람은 밤새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사람의 발길조차 끊긴 대청봉 아래 작은

암자에는 늙은 스님과 어린 동자승 하나만이

살고 있었다.

 

암자의 이름은 훗날 세상에 널리 알려질 오세암.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이 작은

암자가 기적의 전설을 품게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설정스님은 어느 날 쌀독을 들여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을 날 양식이 바닥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다간 큰일이구나…”

 

설악산의 겨울은 인간의 힘으로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눈이 한 번 쏟아지면 길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짐승조차 자취를 감췄다.

 

지금 내려가지 않으면 굶주림 속에 겨울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스님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짓누른 건

다섯 살 동자승 선두였다.

 

선두는 부모를 잃고 암자에 맡겨진 아이였다.

작은 몸집에 맑은 눈을 가진 아이는 늘 스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목탁을 두드리고 불경을

외우곤 했다.

 

설정스님은 짚신끈을 고쳐 매다가 끝내

선두를 불러 앉혔다.

 

“내가 양식을 구해 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닷새는 걸릴 게다.

그동안 혼자 있을 수 있겠느냐?”

 

아이의 얼굴에 겁이 비칠 줄 알았다.

하지만 선두는 뜻밖에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혼자가 아니에요, 스님.”

 

“응?”

 

“관세음보살님이 같이 계시잖아요.”

 

순간 설정스님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눈앞의 어린아이가 마치 오래 수행한

노승처럼 느껴졌다.

 

스님은 떨리는 손으로 선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관세음보살님이 계시지.

무서우면 꼭 관세음보살님을 불러야 한다.”

 

선두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님!”

 

설정스님이 산문을 나설 때, 암자에서는

이미 목탁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딱… 딱딱… 딱…

 

작은 손으로 두드리는 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산 전체에 번져 나가는 듯했다.

 

스님은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지만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날 저녁 가까스로 양양 마을에 도착해

시주를 구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이었다.

 

쿠르르릉—

 

하늘이 갈라질 듯한 소리와 함께 눈보라가 몰아쳤다.

마을 사람들은 산으로 돌아가려는 스님을 붙잡았다.

 

“스님, 지금 설악산에 오르시면 죽습니다!”

 

결국 설정스님은 하룻밤을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세상은 완전히 눈 속에 묻혀 있었다.

지붕 처마 끝까지 눈이 차올랐고 길은 흔적도 없었다.

 

설악산은 더 심했을 것이다.

 

스님은 며칠만 지나면 괜찮아지리라 믿었다.

그러나 눈은 그칠 줄 몰랐다.

 

하루가 지나고,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산길은 열리지 않았다.

 

설정스님은 몇 번이고 산에 오르려 했다.

하지만 번번이 눈 속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선두야… 선두야…”

 

그 이름을 부르며 정신을 잃곤 했다.

 

겨울은 너무 길고 혹독했다.

 

그리고 마침내 봄.

 

얼어붙었던 계곡에서 물소리가 들리고 산새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설정스님은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설악산에 올랐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스님은 멈추지 않았다.

 

대청봉에 이르렀을 때였다.

 

바람 사이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딱… 딱딱… 딱…

 

목탁 소리였다.

 

스님은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맑은 음성.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선두였다.

 

스님은 미친 듯 산길을 뛰어 내려갔다.

 

눈 녹은 진흙길에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암자 앞에 도착한 순간—

 

법당 문이 천천히 열리며 한 젊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색 치맛자락이 봄바람에 흩날렸다.

여인은 말없이 미소를 지은 뒤 찬란한 채색

구름을 타고 하늘로 사라졌다.

 

설정스님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관세음보살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법당 문을 열자 작은 목탁을

두드리던 선두가 환하게 웃었다.

 

“스님!”

 

“선두야…”

 

스님은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떻게 살아 있었느냐…!”

 

선두는 너무도 천진하게 대답했다.

 

“스님이 관세음보살님 부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불렀더니 정말 오셨어요.”

 

“……”

 

“같이 놀아 주시고 밥도 먹고 재워 주셨어요.

우리 어머니 얼굴이랑 똑같이 생기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설정스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스님은 선두를 안고 한없이 울었다.

 

그날 이후 설정스님은 다섯 살 선두의 기적 같은

인연을 기리기 위해 암자의 이름을 새로 지었다.

 

‘다섯 살 아이가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살아남은 암자’

 

그래서 이름 붙여진 절이 바로

오세암 이다.

 

세월이 흐르며 오세암은 여러 차례 다시 지어졌고,

전쟁 속에서 불타 없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설악산 깊은 산중에는 어린 선두의

목탁 소리와 관세음보살의 전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고 전해진다.

 

눈보라조차 끊지 못했던 믿음의 이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