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자 여러분, 한 가지 이야기를 먼저 들려
드리겠습니다.
옛날에 한 구도자가 소크라테스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소크라테스는 아무 말 없이 그를 강가로
데려가 물속에 머리를 눌러 잠기게 했습니다.
구도자는 숨을 쉬지 못해 발버둥을 쳤습니다.
한참 후에야 그를 끌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물속에서 네가 가장 원했던 것이 무엇이냐?”
“숨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 숨을 원한 만큼
진리를 원하라. 그러면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불자 여러분, 해탈도 이와 같습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마음으로는
도에 이를 수 없습니다.
숨을 찾듯, 목마른 이가 물을 찾듯, 간절히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종일 “나무아미타불”을 외운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정도의 삶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염불은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과 바른 행위
없이 어찌 깨달음이 자라겠습니까?
마치 씨앗을 손에 들고만 있으면서 열매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씨앗은 흙에 심고, 물을 주고, 햇빛을 받아야
싹이 트듯이, 우리의 수행도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세상에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이 많아도 오직 그 사람만 보입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그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마음으로 ‘내면의 불성’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면의 진아’를 향해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진정한 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만해져서 “나는 남보다 돈이 많다,
지위가 높다, 더 잘났다”고 우쭐댄다면, 그 마음은
흙탕물과 같습니다.
흙탕물에는 달빛이 비쳐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맑아야 불성이 비춥니다.
오히려 가진 것이 적은 농부, 가난한 이웃들은
마음이 단순하고 순수하여 부처님을 더 간절히
찾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합니다. 천국과 현세의
기준은 반대일지도 모른다고.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곧 도에서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불자 여러분, 해탈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간절히 찾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숨을 찾듯이, 사랑을 찾듯이,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그렇게 불성을 찾으십시오.
여러분 모두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해탈을 이루시기를 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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