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 조선시대. 강원도 강릉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길을 나선 두 친구가 있었다.
둘은 어릴 적부터 함께 공부한 막역한 사이였다.
하지만 성향은 정반대였다.
한 사람은 독서와 학문만 믿는 현실적인
선비였고, 다른 한 사람은 불심이 깊어
가는 곳마다 절에 들러 관세음보살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여주를 지나 한양으로 향하던 어느 날
밤이었다.
주막 방 안에서 책을 읽던 친구는 문득
옆자리가 빈 것을 발견했다.
“또 절에 갔군.”
그는 피식 웃으며 주막 옆 작은 절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는 싸늘한 법당 안에서 촛불 하나 켜 둔 채,
관세음보살상 앞에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친구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어디 한번 놀려볼까?’
그는 몰래 불상 뒤로 숨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나는 관세음보살이니라…”
법당 안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기도하던 선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장난을 치던 친구는 웃음을 참으며 아무
말이나 이어갔다.
“이번 과거에는 ‘今而後知君之犬馬畜伋’
그리고 ‘悅賢不能擧 又不能養也 可謂悅賢乎’
이 두 문장이 반드시 나올 것이니라…”
말을 마친 그는 들킬까 싶어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저 심심풀이 장난이었다.
그런데…다음 날부터 친구의 행동이 이상했다.
다른 책은 펼쳐보지도 않았다.
오직 그 두 문장만 미친 듯이 외우기 시작한 것이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잠들기 전에도
중얼거렸다.
“今而後知君之犬馬畜伋…”
“悅賢不能擧…”
장난을 친 친구는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여보게… 설마 그 말을 진짜 믿는 건 아니지?”
하지만 친구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관세음보살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아니, 그건…”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한 그는 애써 둘러댔다.
“그래도 다른 공부도 좀 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미 답을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과거시험 당일.
시험지가 배부되자 시험장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친구의 눈이 커졌다.
시험 문제 중 하나가…
정확히 그 문장이었던 것이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친구는 거침없이 붓을 움직였다.
이미 수백 번, 수천 번 외운 문장이었다.
답안은 물 흐르듯 써 내려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시험관 한 명이
황급히 들어오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상부의 명으로 문제 하나를 즉시 교체한다!”
시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선비들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하지만 교체된 문제를 본 순간,
그 선비는 숨을 삼켰다.
새 문제 역시…그가 외우고 또 외웠던
바로 그 내용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압도적인 답안으로 장원급제했다.
임금은 직접 어사화를 내려 주었고,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 칭송했다.
며칠 뒤. 새 관리가 되어 임지로 떠나기 전날 밤.
장난을 쳤던 친구가 조심스럽게 찾아왔다.
그리고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보게… 사실은 말이야.”
그는 얼굴을 붉히며 털어놓았다.
“그날 관세음보살 목소리는 내가 장난친 것이었네.
불상 뒤에 숨어서 아무 말이나 한 거였어.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걸 믿고 그 문장만
공부했던 건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장원급제한 친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아.”
“입도 없는 돌부처가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말을 하려면… 사람의 입을 빌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 말을 남긴 그는 말에 올라 유유히 임지로 떠났다.
그리고 남겨진 친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세상에는 장난처럼 던진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운명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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