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상개념

스승에 대하여(펌)

by 법천선생 2006. 6. 11.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좋은 상점을 알고 있는데, 왜 시장 안의 다른 상점들을 뒤지고 다닙니까? 쓸모 없는 일이고, 시간의 낭비입니다. 참 스승 guru 을 찾았으면, 방황은 끝내십시요. 이제 사다나를 실천하고, 최종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십시요.

구도자에게 스승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이가 위험한 물가로 가면, 어머니는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 갑니다. 스승도 이와 같이 필요할 때마다 제자에게 알맞은 지침을 내려 줍니다. 스승은 언제나 제자를 지켜 보고 있습니다.

신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스승 곁에 가까이 있을 때 우리는 비길 데 없는 독특한 그 무엇을 느낍니다. 바람은 어디에나 붑니다. 그러나 나무 그늘 아래 있을 때, 바람은 더욱 서늘하게 느껴집니다. 숲에서 불어 오는 시원한 바람은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걷는 사람에게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줍니다. 이처럼 타는 듯한 세속의 열기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숲바람과 같은 스승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단지 곁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스승은 우리에게 내적 평안과 차분함을 불어 넣어 줍니다.

햇볕 아래 아무리 오래 놓여 있었다 해도, 바람이 부는 실외가 아니면 배설물의 악취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명상을 아무리 오래 했다 해도, 스승과 함께 살지 않으면 바사나는 제거되지 않습니다. 스승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스승의 은총은 때묻지 않은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흘러 들어갈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제자는 스승께 완전히 항복해야 합니다. 아이가 알파벳을 배울 때, 교사는 아이의 손을 잡아 모래 위로 움직여 글씨를 쓰게 합니다. 교사가 아이 손가락의 움직임을 통제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오만하게 ‘나도 알아,' 라고 생각하고 교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아이가 무슨 수로 알파벳을 배우겠습니까?

경험은 만인의 진짜 스승입니다. 아이들이여. 슬픔은 여러분을 신께로 가까이 가게 해주는 우리의 스승입니다.

우리는 스승에 대해 바야박티 bhaya bhakti (외경에 기초한 헌신적 믿음과 사랑) 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스승과의 친밀한 인간 관계도 필요하고, 이 스승이 정말 내 스승이라는 느낌도 필요합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심하게 때리고 밀어 내도, 아이는 계속해서 어머니에게 매달립니다. 바야박티는 영적인 진보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이익은 스승과의 친밀한 인간 관계를 통해 얻어질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여. 스승에 대한 사랑만으로 여러분의 바사나 vasana (숨은 성향) 를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의 바른 이해에 기초한 박티 bhakti (애신 - 신을 믿고 사랑함, devotion) 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박티와 믿음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과 이성(理性)을 다해 스승께 헌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승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복종은 제자의 바사나를 뿌리째 뽑아 냅니다.

나무 그늘에 씨를 뿌렸습니다. 싹이 트면, 다른 곳에 옮겨 심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묘목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제자도 묘목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도 스승 곁에 한동안 (2, 3년) 반드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후에는 고독한 곳에서 사다나를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제자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일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서 바라는 것은 제자의 영적 성장 뿐입니다. 제자의 성장과 단점 제거를 위해 시험과 역경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제자는 범하지도 않은 실수 때문에, 스승에게서 비난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험을 묵묵히 견뎌내는 사람만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직 실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누가 참스승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공 부화된 병아리는 이상적인 사료와 환경이 없으면 살아 남지 못합니다. 반면, 시골 병아리는 사료와 환경에 상관없이 살아 남습니다. 스승 곁에 사는 사닥 sadhak (구도자) 은 시골 병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는 굳건함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도 그를 노예처럼 구속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스승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얻어진 영적 강인함이 있습니다.

스승을 소유하려는 태도를 가진 제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런 제자들은 자기 혼자서 스승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려 합니다. 그러다 원하는 만큼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 같으면, 스승을 비난하고 떠나기도 합니다. 스승의 사랑을 원한다면, 제자는 무아 無我 적으로 봉사하는 법부터 반드시 배워야만 합니다.

신의 분노도 진정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승을 모욕하는 죄는 신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신과 스승은 모든 사람들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 초기에는 외적 스승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다 특정 시점이 지나면 외적 스승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때부터 구도자는 모든 것 속에서 본질적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구도자는 혼자서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아직 학습 목표가 분명치 않은 아이는 부모나 교사의 꾸중이 두려워서 공부를 합니다. 그러다 한번 자신의 목표를 결정하면, 그때부터 자는 것도 잊고, 노는 것도 잊고 스스로 알아서 공부에만 전념합니다. 아이가 심약해서 부모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수행의 목표가 내부에서 분명하게 인식되어지면, 제자의 내부에서 스승이 깨어나게 됩니다.

스승은 준비된 사람만을 제자로 받아 들입니다. 스승의 은총이 없으면, 우리는 그가 스승인지 스승이 아닌지도 알 수 없습니다. 진실한 구도자에게는 겸손함과 단순함이 있을 것입니다. 스승의 은총은 그런 영혼에게만 흘러 들어 갑니다. 에고가 강한 사람이 스승과 진실한 내적 접촉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느님과 나는 하나다. 하느님과 나는 같다,” 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나와 스승은 하나다” 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스승은 여러분 속의 신성 ‘참나' 를 일깨워 준 사람입니다. 스승의 이 비길데 없는 위대함은 영원할 것입니다. 제자는 이를 분명히 알고, 그에 따라 처신해야 합니다.

암탉이 갓 깬 병아리를 날개 아래 보호하듯, 스승은 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완벽하게 보호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실수도 스승은 그때 그때 지적해서 바로 잡아 줍니다. 스승은 제자 속에 티끌만큼의 에고 ego 가 자라는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제자의 오만을 잘라 내기 위해, 스승은 때때로 겉보기에 무자비한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대장장이가 불에 달군 쇠를 망치로 두들기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대장장이를 잔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쇠덩이도 ‘대장장이처럼 나쁘고 잔인한 사람은 없다' 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번 망치를 내려 칠 때마다, 대장장이가 생각하는 단 한가지의 것은 머지않아 완성될 쇠덩이의 새 모습 뿐입니다. 아이들이여. 스승도 대장장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상개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즐, 감, 집  (0) 2006.06.13
명상  (0) 2006.06.13
심멸즉영(心滅則靈)  (0) 2006.06.13
24기간 연공법  (0) 2006.06.11
미라래빠 존자  (0) 2006.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