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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개념

가르침(Upadesa)

by 법천선생 2006. 8. 26.

1. 참스승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진아 안에 항상 안주하며, 언제, 어느 장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로써 일체를 평등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2. 참제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불행을 소멸하고 행복을 성취하겠다는 강렬한 욕구와, 온갖 세속적 쾌락을 단호히 멀리하는 것입니다.

3. 우빠데샤(upadesa-가르침)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우빠데샤’란 말은 ‘가까운 곳(장소)’[upa-가까움, dsa-장소]이라는 뜻입니다. 상(sat), 식(chit), 락(nanda)[존재, 의식, 지복]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바의 화현인 스승은, (가까이 있는 제자에게 가르침을 베풀어줌으로써) 제자가 감각 대상들의 형상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자신의 참된 성품에서 벗어나 기쁨과 슬픔에 의해 끊임없이 고통 당하고 농락 당하는 것을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하고, 그를 아무 차별상 없이 자기 자신의 참된 성품 안에 뿌리내리게 합니다.

‘우빠데샤’는 또한 멀리 있는 대상을 아주 가깝게 보여주는 것을 뜻합니다. 제자는, (자기와)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자신과는 별개라고 믿어 온 브라만이, 자기 가까이 있으며 그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납득하게 됩니다.

4. 스승이 바로 자신의 진아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제자가 아무리 많이 배웠고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다 해도 스승의 은총 없이는 진아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는 가르침의 본뜻은 무엇입니까?

절대적 진리 안에서는 스승의 상태가 자기 자신의 상태이지만, 무지 때문에 개아가 되어버린 자아는, 스승의 은총 없이는 자신의 진정한 상태 또는 성품을 깨닫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참스승의 친존에 있기만 해도 모든 정신적 개념들은 제어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배움의 바다 저쪽 언덕을 보았다거나 혹은 누구도 거의 할 수 없는 행위들을 자신은 해낼 수 있다고 오만하게 주장할 때, 만약 스승이 그런 사람에게, “좋습니다. 그대는 배울 수 있는 것을 모두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법을) 배웠습니까? 그리고 그대는 거의 불가능한 행위들을 할 수 있다지만, 그대 자신은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면, 그들은 (부끄러워서)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다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다른 어떠한 성취에 의해서도 불가능하고, 오직 스승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5. 스승의 은총(anugraha)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과 생각을 넘어서 있습니다.

6.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제자가 스승의 은총에 의해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깨닫는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마치 코끼리가 꿈속에서 사자를 보고 (놀라서)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코끼리가 사자를 보자마자 깨어날 수 있듯이, 제자도 스승의 자비로운 은총의 눈길에 의해서 무지의 잠으로부터 진지의 각성 상태로 깨어날 수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7. 지고의 주(Sarvesvara)의 성품이 곧 참스승의 성품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진지의 상태 또는 주(Isvara)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개아는 부단히 헌신을 수행합니다. 그의 헌신이 어느 정도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면, 그 개아를 지켜보아 온 자(주시자)이면서 또한 그와 동일한, 지고의 주가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의 세 가지 본질적 속성인 존재-의식-지복의 도움하에, 형상과 이름까지 우아하게 갖추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는 제자를 축복하는 듯이 하면서 그를 자신의 안으로 흡수합니다. 이러한 이치에 따라 스승은 진정 주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8. 그러면 어떤 위대한 사람들은 어떻게 스승 없이 진지를 성취했습니까?

소수의 성숙된 사람들에게는 주가 형상 없는 지의 빛으로 나타나서 진리의 자각을 전해줍니다.

9. 헌신 혹은 싯단따(Siddhnta)[즉, 샤이바 싯단따]의 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화된 세 가지 도구[몸, 말 그리고 마음]를 가지고 신의 종으로서, 사심 없는 헌신의 마음으로 하는 모든 사람의 행위는 신의 행위가 되며, ‘나’와 ‘내 것’이라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뚝 선다는 진리를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샤이바 싯단따파의 사람들이 지고의 헌신 혹은 ‘신에 봉사하는 삶’이라고 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10. 지 혹은 베단따(Vdnta)의 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가 주[이슈와라(Isvara)]와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알고, 행위자 관념[아상]에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11. 이러한 두 길의 목적이 동일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떤 수단으로든 아상과 아소상[‘나’라는 느낌과 ‘내 것’이라는 느낌]을 소멸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또 이 두 가지는 상호 의존적이므로 어느 하나를 소멸해도 다른 하나를 소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각과 말을 넘어서 있는 그 침묵의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느낌을 제거하는 지의 길이나, ‘내 것’이라는 느낌을 제거하는 헌신의 길중의 어느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래서 헌신과 지의 길들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주 : ‘나’가 존속하는 한 주(Lord)를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 만약 누구든지 지금은 자기가 잃어버린 지고의 동일성의 상태(신과의 합일 상태)를 쉽게 되찾고 싶다면,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12.  아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나는 나다’ 하는 아상의 형상을 한 개인적 자아가 아만입니다. 지성의 본질을 지닌 진아는 전혀 ‘나’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각능력이 없는 육체가 ‘나’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 에고가 지성 있는 것과 지각능력 없는 것 사이에서 불가사의하게 나타났다는 것이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며,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 에고를 소멸하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해탈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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