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아니 명상들은, 아니 명상이든 명상이 아니든 내 실체가 드러나면 그 자체가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명상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 실체가 언제 드러나냐 입니다.
내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명상이든, 명상이 아니든 그런 행위는 본능일 뿐입니다.
본능으로는, 본능적 행위로는 명상을 하든, 명상을 하지않든 절대 깨닫지 못합니다.
윤회를 보면서 윤회를 보는자가 되지 못한다면 그 윤회는 왜곡된 본능일 뿐입니다.
그 윤회를 보는자가 바로 깨달음을 볼 수 있는 실질적인 주체입니다.
그때 참나, 실제의 나, 나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단지 윤회를 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윤회를 보면서도 부처님은 한번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는데, 대다수의 누구들은 윤회를 통해 왜곡된 거짓만을 보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윤회를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윤회를 보면서 윤회를 보는자가 되지 못하면 그것은 윤회를 보지 않는 것 보다도 못합니다.
윤회를 본다는 것은 실제적인 현상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상황으로 윤회를 보는지 모릅니다.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알려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방식인 꿈꾸듯, 꿈에서 행위하듯 윤회를 보는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윤회는 윤회가 아니라 마음의 장난에 불과합니다.
그 윤회들은 마음에 의해 왜곡된 윤회입니다.
그런 윤회를 보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망상은 품지 마십시요.
윤회를 보면서 윤회를 보는자를 보지 못하면 그 윤회는 버리십시요.
윤회를 보는자는 나 자신의 실체입니다.
나의 마음, 나의 에고, 나의 의식이 아닙니다.
나의 실체가 드러나 윤회를 보아야합니다.
그때 나의 실체는 단지 윤회를 보는자에 불과합니다.
그 나는 그 어떤 느낌이나 인식을 가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실체는 생각하거나 사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윤회를 보는것은 그 상태에서 깨어나서입니다.
윤회의 당시에는 그 어떤 감정이나 감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감정이나 감각이 일어나는 윤회는 이미 왜곡된 거짓일 뿐입니다.
윤회가 드러날때 나는 윤회의 전면에 있습니다.
윤회는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 아닙니다.
윤회는 윤회의 바로 앞에서 지켜보는 것입니다.
윤회가 내 앞에서 진행됩니다.
삶을, 현실을 바로 눈앞에서 보듯 나는 윤회속의 나를 지켜봅니다.
그러나 윤회를 하는 나는 지켜보는 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는 나를, 1m 앞에서 지켜보는 나를, 한발만 내딛으면 윤회의 현상으로 들어갈것 같은 나를 윤회는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 상태에서 나는 윤회는 지켜봅니다.
현실 그대로 지켜봅니다.
섬세한 피부,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올 한올, 옷가에 묻은 먼지 한점까지 드러내며 마치 현실을 보듯,현실이지만 현실보다 더 선명하게 윤회는 진행됩니다.
그때 나는 없습니다.
나 라는 자도 없습니다.
보는 자도 없고, 보여지는 자도 없습니다.
단지 그것은 현실의 천연색 장면입니다.
영화처럼 보이는 화면이 아니라 섬세한 실제의 총천연색 현실 화면입니다.
즉 TV나 영화처럼 촬영된 영상이 아니라 현실을 눈앞에 두고 보는 실제의 현실입니다.
내가 실제하며 행위하는 현실의 화면입니다.
그 현실에서 윤회가 진행됩니다.
지켜보는 자도 없고,
주시당하는 자도 없는,
현실의 현장에서 윤회가 진행됩니다.
형상 없는,
형상 없음도 없는,
보지만 보이지도 않고,
시각이면서도 보이지 않으며,
오직 시각 그 자체인 시각만이 있습니다.
시각의 뒤는 어둠이며,
시각은 어둠과 윤회(윤회의 경계까지)를 오갑니다.
너무도 순간에서 순간을 오가므로 그것을 인식할 틈도 없습니다.
윤회의 앞과 어움의 뒤를 오가며 어느순간 윤회의 앞에 있습니다.
시각의 앞은 회색의 장막입니다.
그 장막안에서,
회색의 장막 일부가 걷히면서,
바로 눈앞에서,
전생의 경계 바로 앞에서,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서 현실이 진행됩니다.
아무 느낌도 없고,
아무 감각도 없으며,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런 사념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확연하게,
그토록 섬세하게,
그토록 또렸하게 시야가 보입니다.
독수리의 눈으로 본들 그렇게 명확하게 볼 수는 없는 투명한 시야입니다.
이런 윤회가 아니라면 제아무리 윤회를 본들 깨달을리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 감정을 지닌 마음이 아무리 윤회를 본들 깨달을리 없습니다.
윤회를 보며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하는 것은 본능의 신파극일 뿐입니다.
그런 윤회는 얼른 쓰래기통에 버리십시요.
그것은 윤회가 아니라 꿈입니다.
꿈은 윤회가 아닙니다.
꿈과 윤회를 구분하지 못하면 윤회는 말장난일 뿐입니다.
명예를 얻고 돈벌이가 되는 직업일 뿐입니다.
그런 윤회, 그런 추잡한 윤회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꿈으로 깨달음을 얻는것 과도 같습니다.
마음으로 윤회를 본다는 것은, 꿈을 꾸는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꿈에서 아무리 풍부한 경험을 한들, 각성을 한들 그것은 한낱 꿈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런 꿈들을 통해서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겠다는 망상부터 버리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는 방식의 윤회가 아니라면,
윤회를 보는 실체가 드러난 것이 아니라면,
무심의 상태에서 보여지는 윤회가 아니라면,
명상에서 무심에 들지 못했다면 그 모든 윤회는 꿈으로 치부 하십시요.
그렇지 않은 윤회를 드러내는 것은 윤회를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웃음거리로 밖에 만들지 못합니다.
그럴바에야 윤회를 없다고 하는것이 더 낫습니다.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윤회를 경험한 사람은 윤회를 믿지 않는것이 낫습니다.
윤회는 거짓입니다.
결코 있지도 않은, 존재하지 않는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윤회를 믿지 마십시요!
그렇지 않으면 윤회의 함정에 빠집니다.
있지도 않은, 왜곡된 윤회만 믿다 마음의 함정에 빠집니다.
윤회의 마음이 전면에 드러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윤회의 무의식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가공되지 않은, 절제되지 않은 무의식이 드러날때...
내가 미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집중된 마음으로,"
모든 명상은 집중과 이완입니다.
집중하든, 이완하든 그것은 관계 없습니다.
어느 한 극단으로 가면 그것의 결과는 같습니다.
그러나 그 극단의 끝으로 가는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 집중과 이완의 끝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명상을 하면서도 명상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 끝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마음으로 명상을 하기 때문입니다.
집중된 마음으로...
지금 남전 대장경을 쓰는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이전에 내려오는 원문 그대로를 쓰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남전 대장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빛어진 실수일지 모르지만...
아니면 용어상의 혼동인지 모르지만...
마음을 집중해서 명상을 하는것은 명상을 하지 말자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명상은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드러나지 않을때 명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결코 그 집중을 오래 유지하지 않습니다.
그 집중은 순간으로 끝납니다.
마음은 어느 한순간도 멈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람따라, 시간따라,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무 요인이 없어도 마음은 사념에 따라, 상상에 따라 언제든 변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런 요인이 아니라도 육체의 감각이 느껴지는 대로 어느때나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 찰라의 순간에 마음의 양극단에서 명상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집중하고"는 정말 어려운 경지입니다.
나는 그런 어려운 명상을 할줄 모릅니다.
마음을 이완하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마음을 이완하는지 모르지만 이것도 너무 어려운 경지입니다.
마음의 집중이든, 이완이든 그 양극단에 이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경지입니다.
나는 절대 그곳에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무의미한 노력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마음이 멈춰진 무심에 가는것이 훨씬 쉬운데 쉬운길을 두고 그 어려운 고행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길을 가는 자체가 바로 본능입니다.
"저 길을 가면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마음의 장난입니다.
나는 그런 인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을 집중하는 방식은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심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가 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도 아닌 마음을 왜 집중 하겠습니까?
나 자신의 실체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마음을 집중 시키겠습니까?
무심과 마음은 별개입니다.
그 둘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단지 한 육체에 동거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무심은 생각없음, 사념없음, 상상없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생각이 멈췄다고 그것이 무심이라면 무심도 망상일 뿐입니다.
사념이 없다고 그것이 무심이라면 그 무심은 사기입니다.
상상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무심이라면 무심은 추잡한 쓰래기보다 더 더러운 흉물일 뿐입니다.
그런 비 상식적인 논리로 무심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심은 전적인 마음없음 그 자체입니다.
마음이 있는 한 무심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없을때에만 무심이 나타납니다.
아니면 마음이 완전하게 정지 되었을때 무심이 생겨납니다.
무심과 마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절대 두면이 동시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집중이든, 이완이든 양 극단의 끝에 있지 않는다면 결코 그것은 명상이 아닙니다.
차라리 "의식을 집중하고,"가 더 나은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현의 방식일뿐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느낌입니다.
느낌도 육체나 사람, 주위의 환경이 아니라 시야를 이완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원래 의식은 그 무었도 느끼지 않을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상상하지 않고, 사념하지 않고, 느끼지 않은채 멈추는 것이 의식입니다.
이 의식이 지금 여기에 해당하는 의식입니다.
그 이외에도 의식은 여러 경우에 쓰이지만 이 경우에 쓰는 의식이 지금 언급하는 멈추는, 멈춰진 의식입니다.
집중된 마음이 아닙니다.
이완된 마음도 아닙니다.
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뜨던, 눈을 감던 그 자체가 되십시요.
행위를 하든, 행위를 하지 않든 그 자체가 되십시요.
감각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그 자체가 되십시요.
느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느낌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마십시요.
그 상태가 내가 지금 언급하는 의식입니다.
"의식을 집중하라"는 것은 "의식 그 자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즉 아무것도 느끼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양극단의 한 끝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즉 의식 그 자체로 아무것도 느끼지 말고 남으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빔 그 자체로 있으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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