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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깐학습법/맘샘이 쓰는 일기

엄마가 미안해, 그리고 나의 삼총사 사랑해!

by 법천선생 2011. 7. 4.

                               김 은 희 초교 5학년 母


 세 아이를 둔 평범한 직장맘이다. 

 96년 결혼 후 2년뒤에 찾아온 살림밑천이라는 큰딸, 아빠의 사업실패로 힘든 시기, 희망을 주기 위해 온 둘째딸, 조금은 늦은 나이에 우리 가족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온 막내 아들. 요즘같이 나 살기도 힘든 데 아이를 많이 낳았다는 눈총 아닌 눈총을 받으며 살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힘들고 지칠 때가 많았지만, 지금은 나의 아이들 때문에 웃으며 때로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힘의 원동력이 된다.


 스물여섯, 요즘 시대엔 조금 이른 나이에 애들 아빠와 결혼을 했다. 앞으로의 결혼생활에 대한 무한한 꿈과 기대를 품고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정말 재미있었다. 나

 

름 직장도 괜찮았고, 남편이 하는 일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결혼 후 2년뒤 예쁜 딸아이가 생겼다. 다니던 직장도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그만 두게 되었다. 몇년을 다닌 직장이라 서운하기도 했지만 아이를 위해서 과감히 사표를 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그런 딸을 위해 함께 놀아주고, 책도 보고……. 행복했다. 큰아이는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온갖 재롱을 부리고, 웃음을 주는 그런 아이였다.

 

첫째는 살림밑천이라고 했던가? 어려서부터 엄마, 아빠를 곧잘 챙겼다.

그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 큰 아이가 세 살 되던 해, 둘째 아이가 우리에게 왔다.

 

하지만 다음해부턴가 애들 아빠가 하는 사업이 잘 안되었다. 내집에서 전셋집으로, 전셋집에서 월세로, 나중에는 친정집으로 들어가는 사태까지 갔다. 신혼살림은 모두 헐값으로 처분하고, 빛쟁이가 집으로 찾아오고, 독촉 전화오고…….

 

 애들 아빠는 사업이 잘되다 보니 주식에 손을 댄 것이었다. 나중엔 감당을 못하게 되고, 여기저기서 빛독촉 영수증들이 날아오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정말 얼굴만 보면 싸웠고, 살기가 싫었다. 둘째 낳은지 1년이 조금 넘어서부터 시작된 불화는 끝도 없어 보였다.

 

 도미노처럼 무너져 갔다. 찬바람 숭숭 들어오는 월세집은 갓난아이와 지내기란 정말정말 힘들었다. 화장실도 공동으로 쓰고……. 바깥에 있어 더욱 비참했다.

 

 애들 아빠와 얼굴만 마주치면 인상 찌그러지며 싸우고, 몇날 며칠이고 대화를 안했다. 그러던 중 애들 아빠가 며칠째 연락이 두절됐다. 혹시나 나쁜 맘이라도 먹을까 노심초사하던 중 전화가 왔다. 남편이었다. 제발 무사히 돌아오라고 울며 매달렸다.

 

지난 일은 다 용서해 줄테니 제발 우리 예쁜 딸들을 생각해서……. 울며 전화기에 매달렸다. 통화 후 하루가 지나서 초췌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남편…….  화가 나기도 했지만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어린 아이들도 같이 울고 있었다.

 

같이 죽을 생각도 했지만, 죽을 각오로 살아 보자고 했다.   그 후로 월세마저 정리하고 친정집으로 들어갔다. 큰 딸은 유치원으로, 어린 둘째딸은 친정엄마가……. 나는 다시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아침에 울며 가지말라는 작은 딸을 뿌리치고 일을 하러 다녔다. 애들 아빠도 열심히 생활했다. 중간 중간 일거리가 있을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했다.


 몇 년이 지나 다시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둘째도 유치원 생활을 했다.  처음엔 엄마랑 같이 놀거라고 유치원 안 간다고 하던 딸도 차츰 그 생활에 잘 적응을 해서 언니랑 같이 유치원 다니는 것을 무척 재미있어 했다.

 

 유치원에서 큰아이는 동생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고 했다. 식사 시간이 되어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점심을 나눠주면 내 동생은 왜 아직 안주냐며 선생님한테 빨리 주라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외할머니와 생활을 하다보니 어른부터 챙기는 것을 자연스레 배우고, 동생한테 양보하고, 동네 어른들께 인사하고……. 주변환경이 얼마나 아이들의 교육에 중요한 가를 깨달았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아이들 잘 자라주고 가족의 소중함 깨닫게 해 준 시간이었다.

 요즘 엄마들은 뱃속에서부터 태교를 해서 갓 태어난 아이에게 온갖 정보들을 제공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 거에 비하면 나는 아이들에게 해 준 것이 너무 없어 미안한 생각이 든다.

 

책도 많이 읽어주고, 각종 체험학습도 같이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사느라 바쁘고,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시골 생활을 하며, 자연환경에서 배우고·열심히 일해야 얻는 것도 있고· 사람들과 잘 융화해서 살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돈 주고는 배우지 못할 것들을 배웠다.

 

남을 배려하고,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그런 매력…….  나의 딸들은 그런 매력의 소유자들인 것을 확신한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될 무렵, 시어머니께서 병이 생겨 우리 식구는 시댁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이들 챙기고 시어머니 병간호하며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중 뜻밖에 임신을 했다. 서른네살, 임신하기엔 조금 많은 나이에 말이다.  기쁨보다 지금의 우리 형편과 아이에 대한 앞으로의 교육 등으로 고민이 됐다.

 

며칠을 고민 끝에 우리 부부는 병원을 가기로 결정을 하고, 병원가는 날 아침 시어머니께 말씀드리고 가려고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이 꿈을 꾸셨는데 예사 꿈이 아니었단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형편에 아이 셋을 키우는 것은 힘들다는 말을 남기고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는 여기저기 배불러 앉아 있는 산모들이 많았다.  드디어 내 순서가 되어 선생님 앞에 앉았다. 선생님께서는 “딸이 둘이 있네요.”하시며, “일단 검사부터 하고 다시 말씀하시죠.” 하시는 거다. 그래서 검사를 받고 다시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선생님은 “한 시간을 줄테니 남편분과 다시 생각하고 오세요.”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부부는 다시 밖으로 나와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했다. 나는 키울 자신이 없다는 쪽이었고, 남편은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갖고 태어나니 한 번 키워보자는 쪽이었다.

 

결국은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걱정이 앞섰다.  어머니도 아프신데,  앞으로 병원갈 때마다 들어가는 진료비며, 아니나 다를까 주위의 시선들이 왜 그리 따갑게 느껴지는지, 키울 형편도 못되면서 아이를 낳는다는 그런 시선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우리의 새로운 가족이 탄생했다. 아들이었다. 시어머니는 병중에도 기뻐서 병원으로 달려오셨다. 너무 잘생기고 너무 잘난 아들이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런 아이를 내가……. 아이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잘 키우리라 마음먹었다. 

 

 백일이 될 무렵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아프신 와중에도 손주를 봤다고 안아주시고,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른다. 남들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아프거나 늙으면 잘 가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나의 두 딸들은 그러질 않았다. 잘 때도 할머니 옆에서 자고, 안아주고, 뽀뽀하고…….

 

한편으론 너무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그런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니 아이들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린 아이를 업고 장례를 치루고 뒷마무리까지 모두 끝내고 나니, 온몸은 축 늘어져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똘망똘망한 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아이를 보니 어서 기운을 내야겠다 마음먹었다. 곧 또다른 일상이 시작되었고, 어느덧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큰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고 학부모가 된다고 생각하니 벌써 내 아이가 이렇게 컸나 하는 생각에 아무 탈없이 커 준 아이에게 너무 감사하고 고마웠다. 입학식 날, 고사리 손을 잡고 학교를 들어서는데 가슴이 벅차오르고 떨렸다.  “엄마는 우리 딸을 위해 최선을 다할게.” 하고 딸과 약속했다.

 

 그동안은 책과 함께 할 시간도 부족했고 책도 많이 없었다. 그래서 책을 한 권 한 권 열심히 샀다. 저녁먹고 난 후 세 아이를 모아놓고 책을 읽어주고, 또 아이들이 나에게 읽어주기도 했다. 그 조그마한 입에서 책을 읽어 주는데 얼마나 예쁘던지……. 혼자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작은 집에 책이 점점 쌓여가니 마음도 풍요로워 느꼈다.

 

 나는 교육의 첫걸음은 ‘독서’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요즘 현대인들의 독서량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일주일에 책 한 권 읽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려고 노력중이다. 책속에서 지식을 배우고, 미래를 설계하고, 행복을 꿈꾸고……. “맹모삼천지교”라 했던가? 이 말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겠지만, 나도 군 지역에서 시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아이들에게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좀 더 많은 친구도 사귀고, 문화혜택도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큰아이는 중학교에, 둘째는 5학년, 막내도 벌써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낮선 아이들, 낮선 환경들, 새로운 선생님 등과 만날 테지만, 우선 다른 걸 다 떠나서 아이들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해 주기만을 바랬다. 학기 초 학습이 중요하다고들 했지만, 나는 우선 학교 생활 적응이 우선이란 생각에 학교 갈 때는 “오늘도 학교에서 친구들 많이 사귀고, 재미있게 생활하고 와?” 가 인사였다.

 

 집에 돌아오면, 하루의 학교 생활을 큰아이부터 차례로 이야기하게 했다. 저녁먹으며 그렇게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몰랐던 요즘 아이들의 생활도 듣게 되고 선생님 이야기도 듣고 아이들의 생각도 듣고,  여러 모로 일석이조였다.

 

요즘은 가정에서 가족끼리의 대화가 점점 사라져 마치 투명인간들이 사는 집처럼 되어 버리는 가정이 많다고 한다. 아침, 저녁 먹는 시간에라도 아이들과 대화를 하면, 나도 가족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는다.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아이들도 이야기 중간중간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며 때론 놀라기도 한다.

  

  나도 엄마인지라 아이들이 잘못하면 화내고, 때론 화를 주체못해 소리도 지르고 매도 든다. 그러고 난 후에는 어김없이 후회하고, 아이들을 다독여 준다. 그러면 아이들도 모두 활달한 성격에 금방 또 풀어진다.

 

막내는 나한테 와락 안기며 “엄마 사랑해?”한다. 그러면 나도 또 금방 웃으며 풀어진다. 화를 낼 때는 엄하게 한다. 아니면 아직 어린 아이들인지라 같은 실수를 또 반복하고, 서로 양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이들을 챙겨줄 수가 없다. 그런 엄마를 이해라도 하는 듯 큰아이는 동생들 밥과 간식 등을 챙겨주고, 둘째아이는 막내 동생 숙제며 각종 학습할 것을 챙긴다.

 

학교 숙제며 준비물 등을 서로서로 챙겨주는 아이들을 보면 내가 잘 키웠구나 하는 자부심도 생긴다. 요즘은 아이들을 많이 안 낳아서 하나인 가정이 많다. 그래서 자기만 알고, 자기가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기적인 아이들이 많은 것 같다. 최소한 둘은 되어야 서로서로 챙기고, 의지하고, 배려하는 것을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직장 생활을 마치고 집에 가면 세 녀석들이 우르르 현관으로 뛰어 나와 “다녀오셨어요?”하고 배꼽인사를 한다. 그때마다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신다. 오늘도 역시 저녁을 먹으며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입 모양을 보면 절로 웃음이 번진다.

 

 저녁을 먹고 나면 TV 조금 시청하고, 막내 아이를 옆에 앉히고 책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아이에게 책을 선택하게 하고, 같이 앉아서  ‘엄마 한 쪽, 아이 한 쪽’ 번갈아가며 읽는다.

 

처음엔 읽는 것을 싫어하던 아이도 재미있어 하며 이제는 곧 잘 읽어 내려간다. 중간중간 어렵거나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에 대한 해석도 하고 찾아서 알려고 한다. 다 읽고 나면 책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질문을 하고,  서로 답해준다.

 

 큰아이들은 학원을 대신해 각자의 방에서 온라인 강의를 듣는다. 어떤 광고에 학원의 전기료를 내러 학원엘 가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보았다. 그만큼 능률이 떨어진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 친구들도 거의 학원을 다니는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학원에 가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혼자 온라인 강의 듣고 공부하는 것을 더 좋다한다. 나도 학원위주의 학습은 별로 찬성하지 않아 집에서 공부하게 한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책도 읽고, 그날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친다.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만이 남의 어려움을 알고 배려하고 이해한다. 부디 나의 아이들은 남을 배려하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양보하는 그런 아이들로 자랐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 본다. 

 풍족하고 여유로운 생활은 아니더라도 가족 모두 건강하고 웃음소리 떠나지 않는 온기가 있는 나의 보금자리가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