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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의욕자극

파드마삼바바가 쓴 책 ‘바르도 퇴톨’

by 법천선생 2016. 1. 6.

들으라! 그대는 이제 길을 찾아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그대는 이제 막 호흡이 멈추었고 근원의 눈부신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대가 살아 있을 때 스승에게서 배웠듯이 이것은 죽음의 첫 번째 단계이다. 이 빛은 실재 그 자체이며 허공과 같아서 어떤 꾸밈도 없다. 이것은 그대의 근원적인 마음이며, 비어서 빛나는 그 마음은 결백하고 어떤 꾸밈도 없으며 중심도 경계도 없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 그것의 실체를 인지하라! 그 속으로 들어가라! 그런 일이 발생할 때 나는 그대가 이해하도록 도울 것이다.”

 

임종을 앞둔 사람의 눈이 감긴다. 잠시 후면 그의 영혼은 완전히 그의 몸을 빠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내 몸을 두고 떨어져야 하는 이 상황은 무엇이지? 임종자는 평생 자기자신이라 확신했던 육체를 벗어나야 하는 두려움에 어리둥절해 있다. 이때 인도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린다. 임종자의 두려움을 진정시켜주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목소리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임종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두려움은 두려움의 실체를 직시할 때 사라진다. 모두가 마음의 작용이다. 인도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해서 들려준다. 행여 무의식에 빠진 임종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 염려되는 것처럼. 인도자는 임종자의 호흡이 멎기 직전에 그를 오른쪽으로 돌려눕혀 잠자는 사자(獅子) 자세가 되게 한다. 임종자의 거친 호흡이 멎고 미세한 호흡이 멎을 때까지 인도자의 가르침은 계속된다. 티벳 사자의 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티벳 사자의 서는 파드마삼바바가 쓴 책으로 원제목은 바르도 퇴톨이다. 바르도(bardo)는 틈이라는 뜻이다. 이 세계와 저 세계의 틈이다. 생사의 중간 상태, 낮과 밤사이의 과도기가 바르도다. 티벳에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 환생하기까지 머무는 중간 단계를 바르도라고 부른다. 바르도 상태는 흔히 중음신상태라 불리는데 그 기간은 49일로 알려져 있다. 퇴돌(Thos-grol)은 듣는 것이다. 바르도 퇴톨은 육체를 떠난 영혼이 인도자의 안내를 듣고 해탈하는 방법을 적은 책이다. 부처님은 명상을 하지 않고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다섯 가지 방법을 알려주셨다.

 

첫째는 위대한 스승이나 신성한 대상에 의지하는 것이고

둘째는 성스러운 진언과 축복받은 만다라에 의지하는 것이다.

셋째는 성인들이 준 성화에 마음을 씻는 것이고

넷째는 죽는 순간 자신의 의식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바르도 상태에서 인도자에 의해

가르침을 들음으로서 해탈을 얻는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는 다섯 번째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책은 파드마삼바바가 부처님이 설법한 당시를 기초로 해서 밀교적으로 구술한 내용을 요기니 예세 초걀이 기록한 책이다. 그는 사자(死者)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수행력이 뛰어났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 이 세상에 다시 온 사람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파드마삼바바는 구술을 끝낸 후 그 책을 동굴 속에서 숨기게 했다. 그 신비의 경전을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파드마삼바바는 8세기경 인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연꽃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연화생(蓮華生)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인도 불교학의 중심지인 날란다에서 불교를 배운 후 송첸캄포왕의 초청으로 티벳으로 건너갔다. 그는 티벳에서 수도원건축을 방해하던 마귀들을 쫓아내고 수도원은 완성시켰다. 그는 티벳 뿐만 아니라 부탄 등에도 불교를 전해주었다. 인도 사람인 그를 티벳 불교에서 언급한 이유다. 달마대사를 인도가 아닌 중국 선불교를 시작할 때 언급하는 이유와 같다.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의 씨앗을 뿌렸다면 파드마삼바바는 티벳인들에게 밀교의 씨앗을 뿌렸다. 두 사람이 불교를 전해 준 경로는 다르지만 가르침의 내용은 비슷하다. 즉 살아있는 어떤 것도 개별화된 실체를 갖지 않으며 오직 마음만이 실재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그의 예언대로 티벳 사자의 서는 카르마 링파에 의해 14세기에 티벳 북부지방의 한 동굴에서 처음 발굴되었다. 티벳 해탈의 서와 함께였다. 카르마 링파는 티벳에서 파드마삼바바의 다섯 번째 환생자로 인정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오랫동안 인접 국가를 떠돌다 20세기에 이르러 인도 서벵갈 다르질링에 있는 부티아 바스티 사원에서 재발견되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종교학 교수이며 티벳 불교 연구자인 에반스 웬츠에 의해서였다. 부티아 바스티 사원은 파드마삼바바가 창시한 카큐파종()의 사원이었다. 에반스 웬츠는 각 종파들을 찾아다니며 필사본과 목판본을 찾아 비교 검토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이로써 오랫동안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던 티벳 사자의 서는 에반스 웬츠에 의해 발견된 후 심리학의 거장 칼 구스타프 융의 서문과 함께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융이 티벳 사자의 서를 보고 열광했던 것은 마음의 초월적 기능 때문이었다. 융은 정신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의 제자였는데 스승의 한계에 실망한 후 스승과는 다른 길을 찾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는 형이상학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 높은 차원 즉 신비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스스로 닫아버렸다. 전형적인 서양식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융은 달랐다. 그는 마음에 집중했다. 최면의식에 연구를 거듭했던 이유도 마음과 무의식 때문이었다. 티벳 사자의 서는 마음이 모든 것의 근원임을 밝힌 책이었다. 마음이 초월이고 구원이고 생사의 근원이었다. 마음은 의식의 진화 상태이며 해탈로 가는 과정이고 수업내용이었다. 융은 책을 읽은 후 태어나면서 잃어버린 신성을 되찾는 느낌이었다. 그는 티벳 사자의 서에 들어 있는 초월적인 기능을 검토하면서 심리학적 주제와 지식과 방법에 집중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티벳 사자의 서는 융의 명성과 함께 서구사회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파드마삼바바는 부처님으로부터 생사해탈의 법을 경전화해 세상에 알리라는 명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임에 충실하게 죽음을 앞 둔 사람의 공포를 없애주기 위해 티벳 사자의 서를 구술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지 사자(死者)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생자(生者)들을 위한 필독서다. 생과 사는 하나다. 삶과 죽음은 연장선상에 있다. 생과 사는 우리가 만들어낸 환영이고 무의식세계가 빚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그 환영과 환상이 너무나 깊고 강해 죽어서 몸을 빠져 나가는 순간 우리가 끝난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살아있을 때의 자아(自我)만이 확실한 자기라고 믿는데서 발생한다. 오랫동안 익혀왔던 나()에게 애착이 생겨 육체라는 굴레를 벗어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간 몸(中有)이 생기는 과보를 받는다. 그러나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는 본래가 없는 것이다. 오직 무아(無我)만이 있을 뿐이다. 무아는 자아가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자아가 없다면 나는 무엇인가? 오직 마음이고 의식이고 카르마에 의한 의식의 추동이다. 결국 생사는 의식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티벳에서 인정하는 환생조차도 의식의 연속성이다. 부처님께서 평소에 현상에 속지 마라. 그것이 허상이다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을 한번 듣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것이 살아서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의 삶 자체가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언제 어떻게 우리를 덮칠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다 운 좋게 순조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티벳 사자의 서에 적힌 것처럼 우리 영혼은 뛰어난 인도자의 가르침에 따라 윤회에 들지 않고 바로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알겠는가? 그 때와 그 시간을. 이것이 우리가 티벳 사자의 서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아니 평소에 마음공부를 꼭 해야 되는 이유다. 살아 있을 때 제대로 공부하고 준비한 수행자라면 죽음을 만났을 때 굳이 인도자의 가르침이 없어도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