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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의욕자극

우연히 TV로 접했던 청화 스님과 인연

by 법천선생 2025. 1. 20.


한 동안은 내가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어쩔 수 없어 그냥 살아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으로

살던 때가 있었다.

청소년기에는 가톨릭 신앙 속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결혼 뒤에는 시어머니를

따라 일 년에 두 번 정도 절에 가기는 했다.

 

그러나 법당에는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법당

밖에서 빙빙 겉돌다 돌아오는 일이 고작 이었다.

시어머니는 언제나 절 입구에서부터 지극정성이었다.

정성껏 절을 하고, 전각마다 다니며 빠짐없이 기도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그저 미신이겠거니’ 했다.

공기 좋고 산세 좋은 곳으로 나들이 정도로 여겼다.

그다지 아무런 감흥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2003년 가을쯤이었다. 우연히 불교 TV를 봤다.

노스님이 법문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 땐 법문이란 말도 몰랐다.

 

몸이 많이 아파 보였다. 그래서 힘들어 했다. 그럼에도 정말

간절하게 뭔가를 일러주고 싶어 했다. 순간이었다.

노스님의 그 마음이 온전히 내 가슴에 깊숙이 와 닿았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스님들에 대해 잘 몰랐다.

TV에서 법문할 정도면 아주 훌륭하거나 존경받는 스님인

줄만 어렴풋이 알았다.

 

그런 스님들은 나를 포함해 일반인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수행자처럼 보였다.

 

먼 곳에서 근엄하게 앉아 있는 사람처럼 느꼈다.

그러나 노스님은 그런 선입견을 확 깼다.

 

적어도 내게는.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이 내게 다가왔다.

아쉽게도 법문은 금방 끝났다.

 

처음부터 시청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행처럼 느낄 정도였다.

다시 노스님 법문을 간절히 듣고 싶었다.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불교 관련 미디어에 눈을 떼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선업이 부족했던 걸까. 11월 어느 날 방송에서 노스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열반에 들었다는 뉴스였다. 노스님은 청화 스님이라고 했다.

멍 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스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절박함이 밀려왔다.

 

돌아서서 가는 청화 스님 모습이 눈앞에 스쳐갔다.

순간 두루마기 자락을 꽉 붙잡았다.

온 마음을 다해 애원했다. ‘스님, 어떻게 해서든지 스님 따라가고

싶으니 제발 뿌리치지만 말아주세요.’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다비식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다만 세연을 접은 이에게 49재를 지낸다고 들었던 기억으로

그냥 혼자서 하루에 108번 염불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렇게 49일 동안 청화 스님 생각을 했다.

 

청화 스님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그러면서 청화 스님 재가불자들

인터넷 도량 포털사이트 다음의 ‘금강(입문에서 성불까지)’을 알았다.

앞뒤 재지 않고 가입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비로소 불교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안심법문.’ 내가 주인공임을 일러주는 순간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법문이었다. 뭔지 아직 몰라도 나를 인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다행이었다. 안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