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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의욕자극

- 스리 라마나 마하르쉬

by 법천선생 2006. 8. 20.

행 복

"자기(the Self, 진아)를 육체와 동일시하면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악어의 등을 타고 강을 건너려고 하는 것과 같다. 에고가 일어나면 마음은 그 근원(Source)인 진아로부터 분리되어 마치 공중으로 집어던진 돌멩이나 강물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게 된다. 돌멩이나 강이 그것이 원래 있던 곳인 땅이나 바다에 도달하면 그것은 휴식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도 그 근원으로 돌아가서 휴식할 때 편안해지면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돌멩이와 강이 반드시 그 출발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듯이, 마음도 반드시 - 언젠가는 - 그 근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행복은 그대 자신의 성품이다. 따라서 그것을 욕망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잘못은 그것을 바깥에서 추구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것은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1. 단일성

1. 그대가 보는 현상계와 그대 자신, 즉 현상계를 보는 자를 포함한 모든 것은 오직 하나이다.

2. 그대가 나, 너, 그, 그녀, 그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오직  하나이다.

3. 그대가 지각있는 존재라고 여기는 것들과, 그대가 지각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 땅, 공기, 불, 물 등이 모두 하나이다.

4. 그대가 "모든 것을 하나로" 여기는 것에 의해 얻는 이익(善)은   각각을 다른 것과 별개라고 여기는 것으로써는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하나이다.

5. 모든 것의 단일성(하나임)을 아는 것은 그대에게도 좋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하나이다. 

6. "나는 별개이다", "너는 별개이다", "그는 별개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는 이렇게 행동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저렇게 행동한다. 그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별개이다", "다른 사람들은 별개이다"라는 생각은, 거기서부터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행동의 나무가 자라나는 씨앗이다.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하나임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올바른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분별의 싹이 남아 있는 한, 차별적 행동의 나무는 모르는 사이에도 번성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을 포기하라. 모든 것은 단 하나이다.

7. 질문: 세상에서는 사물들이 서로 다르게 보인다. 내가 어떻게    모든 것을 하나로 간주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지(知)을 얻는 다른 길이 있는가? 답변은, 똑 같은 나무에서 우리는 잎사귀, 꽃, 열매 그리고 가지들이 서로 다른 것을 본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무라는 말 안에 포함되기 때문에 모두 하나이다. 그들의 뿌 리도 같고, 그들의 수액(水液)도 같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물, 모든 육체, 모든 유기체들은 같은 근원에서 나왔으며 단일한 삶의 원리에 의해 작동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이다.

8. 오, 선한 사람이여! 모두가 하나라는 말은 선인가, 악인가? 그대 스스로 생각해 보라.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같이 보고, 들을 자기 자신과 같이 보는 사람은 항상 올바를 것인즉, 자신을 다른 사람이라고 알고,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이라고 아는 그러한 사람에게 어떤 악이 붙을 수 있겠는가? 단일성을 아는 것보다 선을 위해 더 좋은 길이 있는지 말해보라. 확실히 다른 방법들은 이것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그들을 더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들을 모두 하나로 알라(Know them as unity). 그들을 모두 하나로 사랑하라.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 하나이기 때문에.

9. 단일성(unity, 모두가 하나임)을 아는 사람의 마음의 평안과 신선함을 누가 공유할 수 있겠는가? 그는 아무런 근심이 없다. 모든 사람의 선이 그 자신의 선이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안녕을 그녀 자신의 안녕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녀가 별개이며 그녀의 아이들이 별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하나임을 깨달은 진인 (sage)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조차도 뛰어넘는다. 그러한 사랑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는 단일성을 아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러므로 모두가 하나이다.

10. 세계 전체가 그대의 썩지 않는 몸임을 알고, 그대가 전 세계의 영원한 생명임을 알라.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무슨 해되는 것이 있는지 말해보라. 아무 해로운 것이 없는 길을 가는 것을 누가 두려워하랴? 용감하라. 베다서(Vedas)는 바로 이 진리를 가르친다. 그대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선은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 그대는 선 자체가 된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에게서 얻는 모든 것이 오직 선이 될 것이다. 누가 자기 자신의 몸과 영혼에 해를 가하겠는가?

만약 몸에 종기가 있다면 치료를 할 것이다. 비록 아프다 해도, 그것은 좋도록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대의 어떤 행위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 행위들은 세상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그대는 분별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간단하게 말하겠다. 즉, 단일성을 아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바대로 행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단일성을 알기 때문에 그는 행위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잘못할 수 없다. 세상 속에서 그는 눈에 보이는 신(God visible)이다. 모두가 하나다.


2. 그대

1.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이 육체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대는 그대가 깊이 잠들었을 때 뱀이 이 육체 위를 기어가도 모르는가? 그렇다면 그대가 이 육체일 수 있겠는가? 아니다. 분명히 아니다. 그대는 이 육체가 아닌 것이 틀림없다.

2. 가끔 그대는 잠을 자면서 꿈을 꾼다. 그때 그대는 그대 자신을 어떤 사람과 동일시한다. 그대가 그 사람일 수 있는가? 그대는 그럴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잠에서 깨어날 때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대는 그가 아니다. 더욱이, 그대는 그대 자신을 그와 동일시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분명히 그대는 그 사람이 아니다. 그대는 그와 별개로 존재하는 자이다.

3. 꿈 없는 잠을 상기해 보라. 그때 그대의 상태는 어떤 것인가? 그것이 그대의 참된 성품일 수 있는가? 확실히 그대는 이러한 믿음에 찬동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그대는 그대가 있는 상태를 알지 못하게 가로막는 그 엄청난 어둠과 그대 자신을 동일시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기 때문이다. 주위의 사물들과는 지성에 의해 구별되는 그대가, 어떻게 그대 자신을 무지 혹은 공백 상태와 같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그것이 어떻게 진정 그대의 참된 성품일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대는 이 상태가 그대의 참된 성품을 가리는 짙은 어둠의 하나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아는 '아는 자'(knower)이다. 어떻게 그대가, 바로 그대가 체험하고 저주한 그것일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대는 깊은 잠의 어두운 무지도 아니다. 그대는 이것과도 별개로 존재한다.

4. 이 거친 몸(the gross body)*조차 그대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대는 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일 수 있겠는가? 그대가 이 거친 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는 몸에서 더 멀리 떨어진 어떤 것도 아니다. 또한 꿈속의 사람도 아니고, 깊은 잠의 무지도 아니다. 그대는 이러한 세 가지 상태 및 이 세계와는 별개이다. (*우리의 몸은 거친 몸, 미묘한 몸the subtle  body, 근원적인 몸the causal body의 세 겹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5. 이 세 가지 상태는 단 두 가지 조건으로 압축될 수 있다. 즉, 하나는 주체와 대상이요, 다른 하나는 주체가 그 자신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생시와 꿈의 상태를 포괄하는 반면, 후자는 깊은 잠을 나타낸다. 그대의 모든 경험들은 이 단 두 가지 조건 안에 포함된다. 그 두 가지 모두 그대에게는 낯선 것이다. 그대의 참된 성품은 그것들과는 별개이다.    

6. 만약 그것이 뭐냐고 그대가 묻는다면, 그것은 뚜리야(turiya),  즉 네 번째 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왜 이런 이름인가? 이 이름은 적절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가 경험하는 세 가지 상태 - 생시, 꿈 그리고 깊은 잠 - 는 그대에게 낯설다. 그대의 참된 상태는 이 세 가지와 다른 네 번째 상태이다"라고 말해주는 듯하기 때문이다. 생시, 꿈 그리고 깊은 잠의 세 가지 상태가 하나의 긴 꿈을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면, 네 번째 상태는 이 꿈에서 깨어난 것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그것은 깊은 잠보다 더 안으로 깊고(withdrawn), 또한 생시의 상태보다 더 깨어있다. 따라서 그대의 진정한 상태는 생시, 꿈 그리고 깊은 잠과 구별되는 네 번째 상태인 것이다. 그대는 그것일 뿐이다.

7. 이 네 번째 상태는 어떠한가? 그것은 어떤 것도 특정화(parti-   cularise) 하지 않는 지(知)이다. 그것은 그 자신을 자각 못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네 번째 상태는 어떤 대상도 의식하지 않지만 그 자신은 의식하는 순수지(純粹知, Pure Knowledge)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대는 오직 그것일 뿐이다.

8. 네 번째 상태를 얻은 사람에게 어떤 일이 더 있는가? 실제로는, 누구도 그 상태 즉, 아무런 특정한 지(知)가 없는 그 상태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네 번째 상태를 깨달은 사람은 나중에 이 현상계로 깨어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전과 같지 않다. 그는 그가 네 번째 상태로서 깨달은 것이 이 모든 것으로 빛나는 것을 본다. 그는 이 세상을 그 순수지(純粹知)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내면에서 본 것을, 그는 이제 다른 형태로 바깥에서 보는 것이다. 예전의 분별(differentiation) 대신에 그는 이제 어디에서나 무분별(non-differentiation)의 상태 안에 자리잡게 된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이다. 그 자신과 별개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가 눈을 감고 있든 뜨고 있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의 상태는 변함없이 유지된다. 이것이 브라흐만의 상태이다. 이것이 본연의 영원한 상태인 것이다. 그대는 그 항상 참된 상태이다.         

9. 이 상태를 넘어서는 것은 없다. "안으로"와 "밖으로"라는 말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두가 하나다. 그의 몸, 말 그리고 마음은 이기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다. 그것들의 작용은 모든 이들의 이익을 위한 은총의 작용이 될 것이다. 단편적인(하나하나로 나뉘어진) "나"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의 에고는 다시는 살아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지금 여기서 해탈했다고 말해진다. 그는 그의 몸이 살아 있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며, 그의 몸이 죽는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영원하다. 그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대가 그이다.

10. 신은 누구인가? 그는 은총이다. 무엇이 은총인가? 단편적인 에고가 없는 자각이다. 그러한 상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가 그것을 깨달아야만 알 수 있다. 베다서(書)에서는 그러한 사람을 신을 깨달은 자로, 그리고 신과 하나가 된 자로서 칭송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그리고 이 세상에 베풀 수 있는 이익은 이 상태를 깨닫는 것이다. 사실, 이것 외에는 어떤 상태도 없다. 그것들은 무지의 상태 안에서 나타난다. 아는 자에게는 단 한 가지 상태만 있을 뿐이다. 그대가 그것이다.  


3. 신

1. 신은 누구인가? 신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 자이다. 만약 이 세계를 초월해 있다면, 그와 이 세계간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가? 여기에는 그와 관계되지 않는 것이 털끝만큼도 없다. 그렇다면 세계를 초월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는 우리와,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들을 포함한다. 다른 말로, 생물과 무생물이 함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존재와 사물들을 창조한 그에 대해 우리는 무어라고 말해야 하겠는가? 이 두 가지 중에서 우리는 의식이 있는 존재들이 더 우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그가 우리가 아는 존재들 중 가장 높은 위계에 속해 있다는 것이 전부이다. 우리의 지성은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창조자는 우리보다 우월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지성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인 초월적 존재 "까다울"(Kadawul)은 그가 우리의 지성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까다울" ― 초월적 존재인 것이다.

2. 그러면 신은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는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는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진다. 이러한 정도의 그의 은총으로도 우리에게는 족하다. 우리는 그의 모든 위대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불행을 근절하기에 족할 정만큼의 그의 위대함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현재 상태에서의 우리의 결함들을 치유하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은 조금도 그의 힘을 드러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도에 따라서 알려진다. 아니, 우리는 그를 알고 있다. 그가 아무리 한계가 없다 해도, 그는 어느 정도는 우리의 지식 범위 내에 있다.

3. 그를 우리의 지식의 범위 내로 들어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존재-의식-지복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존재란 소멸될 수 없는 것,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그가 그 자신의 파괴자가 되어 언제라도 존재하지 않게 되어야 하겠는가? 그를 누가 창조했는가? 모든 것의 성품이 소멸될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 그들이 불멸의 하나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기에, 이 불멸의 주재자가 신인 것이다. 그의 소멸될 수 없는 성품이 바로 존재(常)이다.   

이제 의식(識)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의식이라고 할 때 그것은 지(知)를 의미한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며, 우리의 지식과 같이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작용에는 일정치 않음이나 오류가 붙을 수 없다. 그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지(知)이다. 그는 빈번히 우리에게 "그대의 지식은 일정치 않고 오류가 있다"고 가르쳐준다. 그의 창조계에는 무정물(無情物, 지각 능력 없는 무생물)조차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그는 왜 반얀 나무는 저렇게 큰데 그 씨는 왜 그렇게 작게 만들었지?"하면서 사물들의 계획을 조소하는 무신론자가 얼마나 좋은 교훈을 배웠는 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무정물도 훌륭한 질서를 이루면서 나중에 유용하게 될 수 있다면, 그 계획은 의식 있는 어떤 작인(作因, 원인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무정물이 틀림없이 확실한 지식에게만 가능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어줍잖은 지식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가? 아니,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신은 의식이라고도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지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한 욕망으로부터도 벗어난 것이다. 그것은 항상 충만한 평안이다. 그가 무언가를 욕망해야 한다면, 어떻게 그가 우리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가 그로부터 지복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자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리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자기 만족의 상태는 지복의 상태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지복(樂)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세 가지 - 존재, 의식 및 지복 - 는 나눌 수 없다. 그렇지않다면 그것들은 각기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존재-의식-지복(常識樂)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신은 월적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식-지복으로서 우리의 지식의 범위 내에 들어오기도 하는 것이다.

4. 네 번째 상태를 얻어서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사람만이, 신을   진실로 존재-의식-지복으로 안다. 그러한 하나가 어떻게 신과 합일하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다. 그것은 깨달음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러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과 수단들이 있다. 그것은 이야기할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행할 수도 있다. 이렇게 깨달아질 수 있는 자가 신이다.

5. 그는 아무 이름이 없지만, 우리가 그에게 이름을 부여한다. 그는 아무런 형상이 없지만, 우리가 그에게 형상을 부여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무슨 해되는 것이 있겠는가? 어떤 이름이 그의 이름 아닌가? 혹은 어떤 형상이 그의 형상 아닌가? 그가 그 속에 존재하지 않는 소리나 형상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그에 대한 진지(眞知)가 없을 때에는 그대는 자기 좋을 대로 그를 부를 수 있고 그를 기억하기 위해 어떤 형상으로도 그를 상상할 수 있다.

그대 자신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그의 은총을 바라는 것은 전혀 헛일이다. 그대 자신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도 그의 은총을 얻을 수 있다면, 모두가 똑 같을 것이며, 아무런 차이도 있을 이유가 없다. 그는 우리에게 길과 수단들을 보여주었다. 노력해서 목표에 도달하고, 행복하라. 그대의 게으름과 이기주의 때문에 그대는 노력하지도 않고 그의 은총을 기대하게 된다. 모두에게 해당되는 규칙은 그대에게도 역시 해당된다. 그대의 노력을 늦추지 말라. 신은 그대의 노력에 의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

6. 다른 모든 노력을 능가하는 하나의 노력이 있다. 이것은 그러나 이름과 형상을 가지고 신에게 헌신하는 것만큼 효율적이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더 효율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대가, 좋든 나쁘든 모든 존재들에 대해 갖는 사랑이다. 모두에 대한 그러한 사랑이 없으면, 신에 대한 그대의 헌신은 하나의 흉내에 그치고 만다. 그대가 신에게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대가 세상의 어려운 자들에 대한 그대의 임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신으로부터 그대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은 그대의 이기주의라는 나쁜 자질 탓이다.

신이 계신 곳에서는 이기적인 사람들은 아무 쓸모가 없다. 거기서는 일들이 모두 이기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중심이 그의 것이고 그는 모든 중심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그렇게 헌신하라. 신은 그러한 높은 헌신에 의해 진실로 구속되는 자이다.

7. 그대가 신에 대해 이름과 형상들을 계속 구성하면서, 모든 이름과 형상들이 그의 것이라고 이해하고 모두에게 사랑을 보여줌에 따라, 그대의 마음은 점차 성숙될 것이다. 과일이 익어가면서 맛이 좋아지는 것과 꼭 같이, 그대 역시 그대 안에서 선(善)이 늘어나고 악(惡)이 줄어드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성숙해 감에 따라, 그대가 그대의 스승을 만나게 되는 때가 올 것이다. 이것은 그대가 그를 찾아 나선다거나 그가 그대를 찾아 나선다는 말은 아니다. 적당한 때가 되면 그 만남이 일어날 것이다. 모든 것은 각자 자기의 길을 움직여 간다. 그대가 성숙함이 그대들을 만나게 해주고, 그대가 그를 믿게 만들며, 그로 하여금 그대에게 바른 길을 가르치게 하고, 또한 그대로 하여금 그 가르침을 따르게 한다. 그것이 신에 도달하는, 즉 네 번째 상태를 얻게 하는 곧은 길이다. 그대는 그 길을 따라가서 그대의 목표인 존재-의식-지복, 즉 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8. 스승이 보여주는 길은 최종적이고, 곧으며, 단일성을 향해 나아가고, 잘 검증되었으며, 자연스럽고, 인위적이지 않으며, 고통에서 벗어나 있다. 그대가 그 안에 있으면 의심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두려움과 의심은 어둠의 길들의 특성 아닌가? 그것들이 어떻게 스승이 제시한 진리의 길에서 그대를 만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그 길은 스스로 그대에게 다가와서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말해준다.       

그 길에서는 그대가 스승을 만나서 배우는 것 외에는 더 이상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 길은 그대와 스승에게 공통되니,  신이 그것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대보다 앞서, 그가 그 길을 밟아갔다. 그는 그 길을 그대에게 보여주고, 그대는 그를 뒤따르고 있다. 그대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같은 길을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같은 길을 따라올 것인가?

분명히 두려움과 의심은 진리의 길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그대가 일단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면 그대는 물러날 수 없다. 스승의 도움은 단지 그 첫걸음을 내딛게 하는 것이다. 그대는 스승이 그대에게 그 길을 보여주게 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를 신의 사자(使者), 즉 앞에서 말한 방향들 중의 어느 하나 혹은 둘 다로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 성숙된 근기들에게, 그 길을 보여주기 위해 신이 내려 보낸 이로 알라. 그대가 성숙했을 바로 그때, 이러한 신의 사자를 보내는 이는 신이다.

9. 무지한 상태에서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을 박띠(bhakti)라고 하며, 지식을 갖추고 실천하는 것을 쟈나(知, jnana)라 한다. 박띠의 두 갈래 중에서 하나는 이름과 형상을 가지고 신에 헌신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모두에 대한 사랑인 까르마(Karma)이다. 쟈나의 두 갈래 중에서 스승에 의해 제시된 진정한 길을 실천하는 것을 요가라 하며, 그 결과인 상태가 진지(眞知, jnana)이다.

누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그런  다음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언젠가 얻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신을 믿어서 해될 것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도 믿을 수 있다.  이 세계는 그대에게 믿음이 생겨나게 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다. 믿음을 가지라, 그러면 신에 도달할 것이다.

10. 비록 그대가 신에 관해서 이야기되는 것을 모두 믿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신이 존재한다"고 믿으라. 이 (믿음의) 씨앗은 자라나면 아주 강력해진다. 그것은 아주 강력해서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 자체로써 모든 것을 채운다. 그것은 전능하기조차 하여 그대는 신 외에는 아무 것도, 심지어 그대 자신조차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진실로 신은 모든 것이다.


4. 평안

1. 무엇이 평안인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을 때에 세계가 지속된다고 해도, 그가 세계에 대해 무슨 걱정을 하는가? (깊은 잠  속에서) 그의 마음은 평온하고 신선해져 있다. 그가 세계와 직접 대면하고 있으면서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에도 그의  마음이 같은 정도로 평온하고 신선하다면, 거기에 평안이 있다.

2. 세계가 우리와 마주하고 있을 때에도 마음이 그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평가 여하에 달려 있다. 마음은 자기 자신의 재물을 약탈당하면 다른 사람의 재물이 그렇게 약탈당했을 때보다 더 흥분한다. 자기 자신의 물건 중에서도 어느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 다른 것을 잃어버린 것보다 더 큰 걱정을 야기한다. 왜냐? 그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그것들에 관련하여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걱정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는 법을 배운다면, 마음은 극히 평안해질 것이다. 혹은 모든 사물이 우리 자신의 것이며 소중하다고 볼 수 있으면, 역시 고통을 느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왜냐? 우리가 아까워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주 보편적인 관심(신의 관심)은 자신의 그릇을 넘어선다는 것을 아는 마음은, 평온해질 필요가 있다. 또한 자기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권리가 없고, 모든 것은 결국 소멸한다는 것을 느낄 때, 마음은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이리하여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똑같은 가치로 보게 되면, 지속적인 평안이 있게 될 것이다. 평안은 우리의 지적인 평가(대상의 본질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정도) 여하에 달려 있다.

3. 내가 이제 이것을 보여주겠다. 한 사람이 꿈에서 깨어난다. 그의 마음은 그 꿈속에서 본 사물들에 대한 그의 견해 여하에 따라 행복하거나 어지러웠다. 그러나 깨어나면 그의 마음은 꿈속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로 남는다. 그것은 똑같은 것으로 남아 있다. 왜냐? 이제 야 그의 마음이 꿈속의 모든 일들을 평등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꿈이 중단된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왜냐? 그는 그 꿈은 영원하지 않으며 깨어나면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그도 언젠가는 세계라는 이 긴 꿈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신선함의 상태이다. 이것이 평안의 상태이다.

4. 이것은 그의 세계에 대한 관계가 끝나버린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마음의 평안과 신선함만 그의 것이 된다. 그의 행위들은 상황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다. 마음이 평안해진 뒤에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변화는 이것이다. 즉, 그의 마음이 진리를 알았고 집착이 없어졌다는 것, 따라서 그것이 평안 속에 자리잡는다는 것, 그의 행위들은 비록 다양하게 변하지만 항상 치우침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행위들은 가변적이며 치우침이 없을 수 없다. 이리하여 마음의 냉정함은  자기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도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게 된다. 평안은 올바른 행위의 길을 보여준다.

5. 어떤 사람이 불 켜진 등을 손에 들고 길을 간다. 불빛과 길 위의 기복(땅의 울퉁불퉁함)간에 무슨 적의 있을 수 있는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불빛과 어둠은 함께 할 수 없다. 불빛은 어둠을 쫓아내고, 길 위의 기복을 드러나게 하여 그 사람이 주의깊게 오르고 내리며 옆으로 비킬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이 나무 등걸(snags)이 내 발을 다치게 했다"거나 "이 구덩이가 나를 미끄러지게 했다"는 등의 헛된 불평을 하지 않아도 되게 해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안을 얻은 뒤에는, 그 평안의 상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미워하지도 않고 적대하지도 않게 해준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시야에서 세계의 참된 성품과 그것의 장애(snags)를 은폐하는 어둠을 몰아낸다. 사람들을 변화무쌍한 상황에 적응하게 하는 평안의 불빛이 없을 때에는, 그들은 마치 길 위의 나무 등걸을 불평하듯이, 세상을 불행이 가득 차 있다고 욕한다.

그러므로 세계 전체가 하나의 복잡한 꿈임을 알고 나서 최상의 평안을 얻은 사람을, 세상과 무관하거나 세상의 행위들에 무관심하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오직 그만이 세상과 바람직한 조화를 이룰 수 있고, 오직 그만이 행위가로서의 자격이 있다. 이와 같이 평안은 그대의 임무(세상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를 조절해주는 것이다.

6. 세상의 행위들 속에서의 평안인(平安人)의 관심은 그것을 교정   해주는 데 있다. 만약 그가 이 세상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면, 세상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개혁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고 치우침 없음에 대해서는 눈이 멀다.

장님을 길로 인도하거나 눈 먼 것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력 자체가 좋아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변하는 본질로부터 자신의 변하지 않는 성품을 이미 식별해내어 평안해진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개혁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돕지 않을 수 없다. 왜냐? 어린아이가 미끄러져 넘어질 때 그를 일으켜주지 않을 만큼 냉혹한 사람이 있겠는가? 그처럼 또 한 세상의 괴로움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현명한 사람들 아니고는, 누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겠는가?

현자는 이미 마음과 몸으로부터 스스로 물러나 있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 봉사 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마치 짐을 실은 달구지가 (제 스스로) 뒤에 내버려둔 시체를 무시하고 가버릴 때조차 삶의 원리는 영악하지 않은 것과 꼭 같이. (내버려 둘 것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현명하다는 뜻인 듯하다.) 그는 일이나 괴로움을 회피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깨달은 평안만 이 그러한 용기와 냉정함을 부여하는 것이다.

7. 모든 겉모습들에 비하면, 평안은 빈곤하고 아주 약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것은 모든 것을 이긴다. 지구력과 용기에 있어서, 그것은 모든 것을 능가한다. 결국 성공은 이러한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이다. 비록 수미산(須彌山)이 넘어진다 해도, 평안인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 하나 일으키기 어렵고, 그는 전혀 동요됨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세간적인 문제와 영적인 문제들 양자에 모두 도움이 된다. 세상 가운데서 진정한 행복은 그의 것이니, 그 행복은 속박으로부터의 해탈에서 오는 것이다. 평안은 어떤 식으로든 누구에게나 이익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8. 평안에 반대되는 것은 여러 가지이다. 그것들은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닥쳐오면, 우리는 활짝 깨어 있으면서 마음의 섬세한 꽃을 그것들의 그늘로부터 지켜야 한다. 만약 마음의 꽃이 짓밟히면, 그것은 향기와 신선함과 빛깔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그대 자신에게도 쓸모 없어지고, 남에게 선물할 수도 없으며, 신에게 바칠 수도 없다. 그대의 마음은 한 송이 꽃보다도 더 섬세하다는 것을 알라. 그대는 이 꽃으로써 그대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신에게 그대가 해야 할 임무들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내내 똑같은 신선함을 내뿜도록 하라. 마음에 대한 모든 축복은 평안 안에 들어있다.

9. 그대 마음의 꽃으로 그대의 진아의 신을 끊임없이 숭배하라. 마음의 상(相)이라는 아이들이 이 숭배를 지켜보게 하라. 그들은 점차 철이 들어 그들의 유치한 장난을 그만두고 그대 자신처럼 기뻐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들이 그대의 평안을 지켜봄에 따라, 그들은 스스로 그들의 변덕에서 뒤로 물러날 것이다. 그대 자신이 그 숭배를 끈기 있게 계속하라. 마음의 변덕에 휩쓸 리지 말라. 그 반대로 그것들은 그대의 평안에 의해 평안하게 되어야 한다. 모두가 평안해져야 한다.

10. 나는 한 마디로 끝내겠다. 모든 베다서의 핵심은 평안이다.


5. 행위

1. 모든 행위는 신의 것이다. 그의 섭리가 각 사물을 개별적으로 기능하게 하였다. 그의 작인(作因)에 의해 무정물들도 유정물들처럼 그들의 일을 한다. 모든 행위는 그의 것이다.

2. 모두가 그들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데, 신은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무정물들은 나중에 검토하겠다. 먼저 우리의 행위는 누구의 행위인지를 살펴보자. 모두가 보다 높은 상태를 욕망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일한다. 그러나 그들의 성취는 균일하지 않다. 이제 대상(목표)이 동일하고 일(노력)도 동일한데, 그 결과에는 왜 차이가 있는가?

여기에서 신은 우리에게 행위가 그의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다 똑같을 것이다. 조건에 있어서의 차이는 설명될 수 없다.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그들 자신에 대한 그들의 의도는 분명히 정직하다. 같은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조건은 그러나 상이하다. 이것은 모든 행위가 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3. 모든 존재들은 동일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상이한 수준이 있으며, 그들의 상태 역시 그러하다. 이렇게 말하면 이러한 질문이 제기된다. 즉, 무엇이 노력인가? 그것은 단지 하나의 심적인 상(像) 아닌가? 이 모든 상들은 동일한 기원, 즉 모두의 공통된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각자의 노력의 상(像)이 서로 다른가? 여기에서도 역시 신은 우리에게 모든 행위가 그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4. 만약 동일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노력이 개인의 역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면, 이러한 질문이 제기된다. 즉, 이러한 역량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몸과 마음의 것이다. 환경 역시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는 노력을 하기 전에 모든 요인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은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없기 때문에 노력은 그 과제에 대해 동등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행위는 신의 것이다.

5. 또한 만약 몸, 마음 그리고 환경이 그 과제에 대해 점차적으로 동등해질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현재는 역량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행위가 신의 것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6. 이제, 사람들이 그들의 목표를 얻지 못하는 것은 좋은가 나쁜가? 그것은 확실히 좋다. 왜냐? 그들 대부분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공이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아닌지를 지금 그대 스스로 판단해 보라. 그대는 물을 수 있다. 비이기적인 사람들의 시도는 전적으로 성공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겉으로 보면 어느 모로 보나 그들이 비이기적인 것 같지만, 그들은 오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들(오염)은 에고에 의존한다. 만약 비이기적이라고 본 것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불러일으키면, 신은 그들의 의도를 좌절시키면서 그들에게 "그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이고, 내가 그대를 지배한다"라고 가르친다.

이기심에서 벗어나고 에고에서 벗어난 그런 사람은 신의 대리자이다. 왜냐하면 신은 항상 그의 안에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에게는 그에게서 신을 가리는 에고의 구름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모든 의도는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참된 의도(참 욕망)의 소유자이다. 신은 그의 안에서 직접적으로 빛을 발한다. 그에게는 아무런 어둠도 없다. 그는 다만 있는 그대로의 신성한 의도를 알 뿐이다. 그를 통해서 신은 그의 창조의 목적을 성취한다. 모든 행위는 신의 것이다.

7. 만약 참된 의도를 가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느냐? 왜 세상은 모든 은총을 완전하게 받아서는 안 되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답은, 여기에는 하나의 비밀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행위가 신의 것임을 아는 진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알게 하려고 한다. 행위가 신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은 없다. 그러므로 진인들의 모든 의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신과 그의 행위에 대한 자신들의 앎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히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들은 "바로 이 순간에 신을 알라"고 말하지는 않으며, 그러한 앎에 이르는 길과 수단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올바른 행위를 하도록 격려한다. 오직 이 정도에서 그칠 뿐이다. 그들은 "당장 해탈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 보통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진인들은 신에게 "사람들을 당장 해탈시키시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에고에서 벗어났고, "신은 그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있고, 그것을 한다. 내가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으랴?"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자기들의 일을 하고자 할 뿐, 그것의 열매를 얻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신만이 행위의 열매를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일을 할 뿐, 그들 자신의 세계를 창조할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왜냐? 그렇게 하는 것은 에고주의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창조계는 응당 그래야 하는 대로이다. 모든 것이 질서를 이루고 있다. 모든 행위는 신의 것이다.

8. 그들의 행위가 보다 높은 힘에 종속된다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그들이 자기 마음대로 무엇을 만들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그들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하나의 임무로서 일을 한다. 경전에서는 "일을 하라, 그러나 그 열매는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사람이 화를 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어도 무의식적으로 분노에 지배되는 것과 꼭 같이, 참된 의도(참 바램)를 가진 진인들도 세상의 올바르지 못함에 충격을 받아 무심결에 "신이여, 저것을 좋게 해주시오!"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이 분명히 이루어진다. 이것이 세상의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원인이다. 격변은 한 진인의 마음에 스며드는 어떤 바램의 결과인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누가 그것을 바꿀 수 있겠는가? 모든 행위는 신의 것이다.

9.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사물의 자연적인 질서 속에 있다. 또한 그것은 올바르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의 행위이다. 진실로 판단하건대, "도둑으로 하여금 훔치게 하는 것은 그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리지 않다. 왜냐? 왜냐하면 벌을 내려야 할 때에도 그는 도둑으로 하여금 그 절도에 대해 괴로움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이며 그 이상을 아니다. 도둑에 대해서 아무런 악감정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것이 모든 행위가 신의 것이라는 앎의 열매이다.

비록 도둑에 대해 아무런 악감정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절도를 싫어한다. 이 또한 모든 행위가 신의   것이라는 앎의 결과이다. 어떻게 그러한가? 왜냐하면 도둑 자신이 절도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의 물건을 훔쳐 가면 그가 가만히 있겠는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선이 올바르고 악은 잘못이라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행위가 신의 것이라는 앎은 세상에 질서 있는 행동의 시대를 가져 올 것이다. 우리의 앎은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을 반복할 뿐이다. 우리의 앎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또한 신의 행위인 것이다.

10. 신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앎의 열매 가운데, 모든 행위가 신의 것이라는 앎도 그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신이여, 당신은 왜 이렇게 행위합니까?"라고 물을 힘이 없다. 모든 종교들은 이와 유사한 우리의 무력함의 상태를 시인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의 열매들은 우리의 욕망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바꾸어 말해서 우리의 힘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행위가 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적용되는 법칙은 무정물에게도 역시 적용된다. 우리의 법칙이라고 해서 그들의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모두가 하나이다. 비록 어떤 이들이 모든 행위가 신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그들 자신의 무능력은 인정한다. 이 자체가 신의 행위이다.


6. 에고

1. 오 에고여, 세상의 모든 악은 너로부터 나온다. 너를 분쇄하기 위해서 왕들은 법을 만들고 현자들은 가르침을 준다. 헤아릴 수도 없는 옛적부터의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 애석하다! 너는 아직도 살아있다. 너는 단지 숨었다가 다시 또나타난다. 너에게 끝이 없을 수 있는가? 아니, 분명히 끝이 다가오고 있다. 또 다른 에고가 너를 죽이려고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는 브라흐만이다'라고 하는 보편적 에고이다.

2. 자, 에고여, 너의 적이 너와 같은 부류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너는 소멸될 수 있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 너는 "나"라고 자만하고 있다. 왜냐하면 너는 항상 "나", "너", "그"라고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의 적은 이러한 자만에서 벗어나 있다. 어떻게? 그는 모든 차별상을 조화시키며, 모든 것을 자기 안에 녹여넣기 때문이다. 더욱이 너는 그에 대해 적의를 느낀다. 그가 너를 죽이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너에 대해서 아무런 악감정이 없다. 어째서 그런가? 너는 그가 있는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너를 그의 수족의 일부로 간주한다. 그의 곁에서 네가 사라지는 것은 너 자신의 허구성 탓이다. 그는 너를 죽이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그의 시야에서 아무런 중요성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고여, 너는 그의 적이지만 그는 너의 적이 아니다. 더 간단히 말해서 너는 너 자신의 적인 것이다. 왜냐? 너의 탐욕 때문에, 너는 '큰 하나' 앞에서 네가 다른 데서 하듯이 허세를 부린다. 너는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따라서 보편적 자기는 너를 집어삼켜 너의 존재를 희미하게 한 후에 일체의 빛으로서 빛을 발한다.

3. 자, 에고여, 네가 저지르는 악은 한이 없다. 너는 네 다른 사람  들보다 우월하고 다른 사람들이 네 앞에서 굴복하기 전에는 만족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칭호로 명예를 얻을까? 나는 어떤 모습이어야 멋있게 보일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절을 하는가? 다른 사람들이 말없이 나에게 복종하는가? 나를 능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남들이 말하는가?"와 같이 너의 욕망은 끝이 없다.

애석하다! 너의 목숨은 얼마나 짧은가! 그런데도 너는 얼마나 많은 것을 열망하는가! 그리고 너는 얼마나 많은 악을 행하는가! 너는 그러한 생각과, 너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 속에 행복이 있다고 너 자신을 속여 왔다. 이것은 너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왜냐? 다른 사람들도 역시 이러한 모든 것을 얻을 권리가 있지 않은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들 속에 너의 몫은 얼마인가?

사정이 그렇다면, 모두를 지배하려고 헛되이 욕망하지 말라. 너의 헛된 욕망에 의해, 너는 남에게는 물론 너 자신에게도 해악을 초래한다. 나의 우정어린 충고를 귀담아 들으라. 진실로 말해서 네가 너의 철천지 원수로 여기는 그는 너의 친구이다. 그는 너를 진정 위대하고 축복받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에게 순복하라. 이 보편적 에고는 너를 적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너에게 진정 이익을 주는 자이다.

4. 만약 그대가 그에게 자신을 내맡겨버렸을 때 그가 그대를 어떻게 할지를 지금은 그대가 어떤 방법으로도 알 수 없다. 내가 그에 대해 아무리 많은 말을 한다 해도, 그대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에게 순복한 뒤에 자기가 체험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그대를 그의 상태로 올려주지 그 이하를 그대에게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대의 미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고, 바로 그대 자신을 내맡겨라.

순복하는 바로 첫 순간부터 기쁨이 그대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언제든지 돌아서도 좋다. 우유를 마실 때 좋은 맛으로 시작하여 배고픔의 해소로 끝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순복도 기쁨으로 시작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조차도 넘어서 있는 완전한 지복으로 끝난다. 따라서 그대의 목표는 의심할 바 없이 이 보편적 에고("나는 브라흐만이다")인 것이다.

5. 순복한 뒤에 그대의 새로운 이름은 무엇이 될까? 그대 자신의 이름 외에는 아무런 이름도 없다. 베다서는 그대를 찬양하며, 세상이 그대를 칭찬한다. 종교적 가르침들의 핵심이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러면 그대의 형상은 무엇인가? 모든 형상이 그대의 형상이다. 그대의 형상 아닌 어떤 형상도 없다. 베다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대이고, 사원들 안에 숭배하기 위해 안치해 둔 것이 그대이며, 축제와 잔치가 모두 그대를 위한 것이다.   

이제 그대의 힘은 무엇인가? 그대가 있는 곳에서 세상이 움직이는데, 각각이 그대로 인해 그것으로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것이 그대를 영광되게 하며, 그대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것들은 그렇게 해야 할 임무가 있다. 그대는 이것이 그대의 상태일 줄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즉시 시작할 것이며, 스스로 자만하지 말라. 보편적 에고가 그대를 기다린다.

6. 그대는 꿈에서 깨어나고 싶은가 아니면 그 꿈속에 그대로 있고 싶은가? 그 꿈의 상(像)들은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안이하게 있지 말고 잠을 떨치고 깨어나라! 그대는 자신의 마음의 상들을 지켜보면서 더욱 많은 상상을 하고 있다. 그것은 모두 헛된 것이다. 오직, 자신이 만든 환영(幻影)을 보는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라. 그대가 그대 안에서 기멸(起滅)하는 이런 것들이라고 그대 자신을 속이지 말라. 깨어나라! 깨어나는 순간 그대는 깨어나는 것이 이 꿈보다 낫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일어나라! 보편적 에고가 그대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기뻐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7. 이 현재의 꿈이 중단되는 것을 겁내지 말라. 그대는 같은 것을 훨씬 더 낫게 즐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며, 혼동 없이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농담 같이 보일 것이며, 더 이상 그대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다. 꿈속에서 그대 마음의 상상은 형태를 취한다. 깨어나면 그대는 꿈을 하나의 꿈으로만 안다. 꿈을 생시로 잘못 알지 말라. 꿈은 꿈인 줄로 알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대는 "나는 브라흐만이다"(보편적 에고)의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8. 나는 그대에게 그대의 이익을 위해 말했지 나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말하지 않았다. 만약 이익이 없다면 그대는 믿고 행하지 않거나 돌아서 버려야 하는가? 만약 성자들의 모든 충고가 그대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면 내가 그대를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는가? 어떤 상태도 이보다 더 높지는 않다. 그것은 그대의 이익을 위해서이며, 또한 그대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도 스스로 자만하지 말라. 바로 시작하라. 보편적 에고는 그대 자신의 것이다.

9. 오 에고여, 네가 모든 것에 얼마나 노예가 되어 있고 그리하여 고통을 받는지 보라. 너의 상태가 얼마나 가련한지! 모두가 너에게 적대적이다! 네가 "나만을 위해"라고 말할 때, 다른 모든 이들도 "나만을 위해 - 나만을 위해"라고 항변한다. 네가 "나는 대단하다"라고 말할 때, 그들은 "왜? 우리도 그래"하고 항의한다. 너 자신 외에는 모두가 너를 적대시한다. 그들이 야기한 문제들 때문에 너의 환영(幻影)은 백만 겹으로 늘어난다. 그대는 스승에게 순복하고 이익을 얻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면 그대의 모든 적들도 그대에게 우호적으로 될 것이다! 그대가 "이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하고 말한다면, 모두가 그대의 친구가 될 것이다. 그대를 그렇게 관대하게 만들 수 있는 한 분이 있으니, 바로 "나는 브라흐만이다"(보편적 에고)이다.

10. 나는 단 한 마디만 하겠다. 이것은 나의 이기주의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나의 임무이다. 나는 그대를 위해서나 나의 이익을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진리는 "나는 브라흐만이다"(보편적 에고)이다.

         신의 은총의 빛, 전능한 사랑이시여, 나를 축복하소서!

         평안! 평안! 평안!


영원한 삶에 관하여

진아를 잊어버리는 것이 죽음이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삶이다. 그대는 영원한 삶을 바란다. 왜? 현재의 (상대성 속의) 삶은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의 참된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진실로 순수한 영(靈)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하나의 육체와 동일시하는데, 그것은 마음의 한 투사물 - 객관화된 생각 - 이며, 마음 또한 그 순수한 영에서 나온 것이다. 단순히 몸을 바꾸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다. 왜냐하면 단지 에고가 새로운 몸으로 옮겨갈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이 삶인가? 그것은 (의식으로서의) 존재이며, 그것은 그대 자신이다. 그것이 참된 삶이며, 그것은 (시간을 넘어서) 영원하다. 육체 안에서의 삶은 조건지워진 삶이다. 그러나 그대는 조건지워지지 않은 삶이다. 만약 "나는 육체다"하는 생각이 죽으면, 그대는 조건지워지지 않은 삶으로서의 그대의 참된 성품을 회복할 것이다.

 - 스리 라마나 마하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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