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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313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로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시집 1976 2024. 3. 23.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그 집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 2024. 3. 23.
일상(日常)의 기적(奇跡) ㅡ 박완서 일상(日常)의 기적(奇跡) ㅡ 박완서 덜컥 탈이 났다. 유쾌(愉快)하게 저녁식사(食事)를 마치고 귀가(歸家)했는데 갑자기 허리가 뻐근했다. 자고 일어나면 낫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웬걸, 아침에는 침대(寢臺)에서 일어나기 조차 힘들었다. 그러자 하룻밤 사이에 사소(些少)한 일들이 굉장한 일로 바뀌어 버렸다. 세면대에서 허리를 굽혀 세수하기,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거나 양말을 신는 일, 기침을 하는 일,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 내게는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수 없이 병원에 다녀와서 하루를 빈둥거리며 보냈다. 비로소 몸의 소리가 들려왔다. 실은 그동안 목도 결리고, 손목도 아프고, 어깨도 힘들었노라, 눈도 피곤(疲困)했노라, 몸 구석구석에서 불평(不平)을 해댔다. 언제까지나 내 마음대로 될 .. 2024. 3. 23.
업장과 공덕을 넘어서서... 마음을 따라가면 그는 도둑놈이니, 내공덕을 빼앗아가고, 마치 영화 속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니, 그냥 영화 속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오직 염불만 할 것이다. 아무리 마음이 영화 속의 일일지라도 자기 불성에게는 때가 묻어 더럽혀지는 원흉이니, 영화를 보더라도 그냥 보기만 할 것이고, 부처님을 닮아가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염불한다면 어찌 성취가 없겠는가? 마음에 끄달리지 않고 염불하는 슬기로움, 그것이 바로 염불로 해방을 성취하는 법이다. 마음을 따라가면 업장만 남게 되는 것이고, 염불만 따라가게 된다면 공덕이 쌓이게 된다. 나무아미타불! 2024. 3.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