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의 의자, 1888년, 반 고흐 미술관 소장
반 고흐가 그린 고갱의 의자다.
아를에서 고갱과 생활을 할 때 그린 의자지만
고갱이 쓰던 의자는 아니다.
고갱을 생각하며 그린 초상화라고나 할까.
반 고흐는 다섯 살 연상의 고갱을 흠모했고,
고갱이야말로 칭송받아 마땅한 화가며,
그에게서 받은 영향을 인정했다.
귀 자르기 사건으로 고갱과 헤어지기 불과 며칠 전
반 고흐는 이 빈 의자를 그렸다.
동양식 카펫을 배경으로 곡선미가 두드러진 세련된
팔걸이 의자 위에 촛불과 책이 놓여 있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의 상징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그림은 반 고흐 자신의 의자와 두 화가의
대조적인 성격과 창작 방식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고갱의 의자는 가스등이 켜진 밤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이는 증권거래소에서 일했고, 화려한 아파트에서 살았던
세속적인 멋쟁이 고갱을 드러낸다.
현대소설로 알려진 두 권의 책은 고갱의 풍부한 상상력과
지성을 상징한다.
더불어 초와 가스등은 번뜩이는 영감을 의미한다.
이처럼 어두운 실내를 밝히는 촛불에는 고갱의
생산적인 창작능력과 예술성에 대한 반 고흐의
존경심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엔 존경만이 아닌 조롱까지도 담겨 있다.
반 고흐는 고갱의 제안대로 황마로 된 거친 캔버스에
그렸지만 두꺼운 채색을 함으로써 거친 캔버스를 가렸고,
고갱이 경멸했던 빨간색과 녹색의 보색대비를
사용함으로써 그를 조롱했던 것이다.
네덜란드인답게 반 고흐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를
참고했을지도 모른다.
초와 책은 인생의 덧없음을 의미하는 바니타스(vanitas·허무)
정물화의 주요 모티프다.
중요한 것은 고갱이 자기 곁에 있을 때인데도 마치
그의 부재를 예감이라도 한 듯 그렸다.
고갱이 아를로 내려오자마자 마르티니크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그를 떠나보내는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부재하는 자'의 추억을 앞서 그렸던 것일까?
고갱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헛된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 유경희 | 미술평론가 >경향신문 유경희 | 미술평론가 입력 201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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