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교 2학년 학부모 안영희
며칠 전 옆동에 사는 이웃사촌 언니에게 시금치 한 웅큼을 받았다. 시어머니께서 밭에서 손수 기른 유기농 시금치라고 했다. 근데 언니네 가족은 나물반찬엔 영 젓가락이 가질 않는다며 시어머니가 보낸 시금치의 절반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어제서야 냉장고에 넣어둔 시금치가 생각났다. 냄비를 가스렌즈 위에 올려놓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시금치를 다듬다보니 시금치 잎사귀에 벌레가 붙어있었다.
깜짝 놀라 다듬던 시금치를 바닥에 내동댕이 쳐놓고 보니 달팽이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냉장고 야채실에 이틀이나 있었으니 죽었나 싶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달팽이를 손가락으로 눌러보았다. 달팽이가 움찔 움직인다. 접시에 시금치 몇 가닥을 깔고 달팽이를 내려놓았다. 이런 때를 놓칠 수 없는 나는 “얘들아, 엄마가 달팽이를 찾았어.”라며 아이들을 불렀다.
평소 여러 번 불러도 대답 없는 아이들인데 웬일인지 우르르 세 녀석이 뛰쳐나왔다.
“엄마, 어디요? 어디 있는데요?”라며 목을 빼고 소리친다.
“엄마가 시금치를 다듬다가 발견했지. 봐~여기 있네”라며 접시를 내밀었다. 아이들이 너무 신기해하며 바라본다.
“엄마! 근데 달팽이가 죽은 것 같아요. 왜 하나도 안 움직여요?”
“응, 그건 너희들이 갑자기 몰려오니까 무서워서 그런가보다.
그리고 달팽이는 아주 천천히 움직여. 그러니까 가만히 기다리다보면 움직이는 게 너희들 눈에 보일거야.”
“엄마.. 움직여요..움직여! 근데 달팽이 눈은 어디 있어요?”
“어, 그건, 너희들이 찾아봐. 엄마는 지금 요리 하는 중이라 바쁘잖니?”
“엄마, 근데 달팽이는 무엇을 먹어요?”
“글쎄, 달팽이가 시금치에서 나왔으니 시금치를 무척 좋아할 것 같은데..”
“그럼 달팽이는 시금치만 먹어요?”
“아니, 야채는 다 좋아할 것 같아.”
“와! 그럼 달팽이는 뚱뚱보는 없겠네요.”
“그렇겠네.”
“엄마, 근데 달팽이 집은 어디 있어요?”
“몰라, 이 달팽이는 집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집이 없어요? 그럼 얘는 어디에서 자요?”
“글쎄다~ 근데, 얘들아! 엄마는 지금 저녁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지, 질문은 이제 그만!”
또 시작되는 아이들의 질문공세를 당해낼 재간이 없는 나는
바쁜 저녁준비를 핑계로 아이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참을 달팽이에 빠져있던 아이들이 퇴근하는 남편을 붙잡고 다시 시작된 질문에 나는 괜시리 달팽이를 찾아서 이 소란을 피우나싶어 후회를 했다. 아이들이 셋이니 한 가지 일은 놓고도, 눈높이에 따라 질문도 여러 단계, 그에 맞는 대답도 눈높이에 따라 달리해 주어야 이해를 한다.
한참을 아이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던 남편의 불똥이 다시 나에게로 옮겨왔다. 안 보던 자연관찰 책을 찾아달라고 성화다.
오늘도 변함없이 시작되는 나의 새로운 직업, 자료조사원의 임무 수행!!
오늘은 달팽이 편이다. 아이들과 우리 집 달팽이를 비교해 가며, 책 속 내용을 살펴보았다. 우리 집 달팽이는 민달팽이다. 원래 집이 없는 종류다 .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난리다. 원래 집 없이도 잘 사는 종류인데 아이들에게는 불쌍해 보이나보다.
아이들과 책을 보다가 달팽이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달팽이는 자기가 먹은 음식에 따라 똥 색깔도 달라진다 한다. 당근을 먹으면 주황색 똥을, 시금치를 먹으면 연두색 똥을, 양배추를 먹으면 흰색 똥을 눈다하니 참 정직하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달팽이처럼 정직하게 살라고 했다. 6살 막내가 정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정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거야.”라고 대답해 주었다.
“달팽이가 정직해요?”라고 막내가 되묻는다.
“그래, 달팽이는 참 정직해, 자기가 먹은 음식대로 응가 색이 나오니 얼마나 정직하니!”
“엄마, 나도 내가 먹은 음식대로 응가가 나오는데요!”라고 막내아이가 말했다.
“그러니?”
“내가 토마토를 먹으면 응가가 빨갛고 참외를 먹으면 참외 씨까지 다 나오는데..”이런다.
“그래, 우리 막내도 달팽이처럼 참 정직하네”라 칭찬해주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 접시 위에 꼼지락거리는 달팽이를 들여다보았다. 서른 일곱 해를 살면서 달팽이에 대해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었는데, 모르고 살아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던 달팽이의 존재가 이제는 나에게 몰라서는 안 되는 일이 되어버렸다.
예전엔 발에 밟혀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개미 한 마리였는데, 이젠 자기 발에 밟힐까봐 요리조리 피해 걷는 막내 때문에, 내가 더 땅바닥을 쳐다보며 걷는다. 아는 사람이 아니면 인사를 하지 않았던 나였는데 인사 대장 별명을 가진 둘째 때문에 마주치는 사람에게 나도 덩달아 인사를 건넨다.
인사를 하다보면 아이가 인사를 하는데도 그냥 못 본 체 하며 지나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내가 더 화가 난다. 하지만 나의 화냄과는 상관없이 아이는 자기가 인사하는 것 그 자체로 기쁘고 즐겁기만 하다.
가끔씩은 내가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더 자라나게 하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구태여 알지 않아도 될 많은 일들이 이젠 굳이 알아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달팽이 똥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던 때의 나와 달팽이의 정직한 똥을 알게 된 지금의 나는 참 다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전보다 더 많은 책을 읽는다. 육아 지침서도 아니고, 소설책도 아니다. 매일 밤 아이들에게 나는 호랑이가 되어, 공주가 되어, 호호 할머니가 되어 그림책을 읽어준다. 어느 결에 나를 동화구연사로 만든 나의 아이들은 나를 자꾸만 변화시키는 마법사들.
나는 내가 어릴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그림책을 읽으며 상상의 세계 속 주인공이 되어 나의 눈높이가 아닌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배우는 것의 즐거움을 모르고 살았던 나는, 아이들로 인해 배움의 즐거움을 깨달았다. 한 가지를 알려주면 두 가지가 궁금한 아이들 덕분에 나도 덩달아 WHO형의 두뇌를 장착하게 되었다.
엄마를 자라나게 해주어 고마워! 배우는 것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어 더욱 고마워! 너희들을 키우는 즐거움을 준 게 가장 고마워!
'칭기스깐학습법 > 맘샘이 쓰는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빠, 저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0) | 2011.07.04 |
---|---|
영원한 짝사랑 (0) | 2011.07.04 |
내 아이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0) | 2011.07.04 |
엄만 절대 너흴 버리지 않아! (0) | 2011.07.04 |
엄마가 미안해, 그리고 나의 삼총사 사랑해! (0) | 2011.07.04 |